1771년(영조 47년)에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6년에 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
1745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는 대대로 화원(국가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외삼촌과 외할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결혼한 뒤에는 도화서의 김응환에게 그림을 배웠다.
)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김홍도와 그의 스승 김응환에게 1788년 금강산의 산수화를, 1789년에는 몰래 일본 지도를 그릴 것을 명하였다.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김홍도는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서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림을 그린 방법이 비슷하다고 하여 일본에서 첩보활동을 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5년에는 연풍현감이 되었으나 사임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자신만의 개성-당시 조선 미술계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다. 1797년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이러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은 소금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현태(김경림)에게 그림을 그려주는대신, 경제적으로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중인계급들은 그들의 경제적인 위치성장에 걸맞는 예술적인 취향을 김홍도처럼 유능한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만년에는 김한태의 별세로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무동(舞童,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씨름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삶을 다룬 작품활동을 하였다. 1805년 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별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이다.
고양이가 나비를 희롱하는 그림인데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진 김홍도가 전혀 다른 느낌의 영모도를 그린 것이 이채롭다.
그런데 이런 그림에도 의미가 있다.
고양이 묘(猫)는 늙은이를 뜻하는 모(耄) 와 중국 발음이 같고,
나비 접(蝶)은 늙은이 질(老 밑에 至) 과 발음이 같다. -질자 한자가 안나와요.
또 패랭이 꽃은 석죽화(石竹花)라고 하여 청춘을 의미한다.
평범하고도 평화롭기만 한 이 그림이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인 것이다.
타작도
김홍도(金弘道)의 타작도(打作圖)
28×24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타작도〉는 수확기 농촌의 타작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개상에 볏단을 내리쳐 알곡을 털어 내고 있는 대여섯 명의 소작인들과, 그 뒤편에서 이들을 감독하는 마름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농부의 표정들이 모두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어서 힘든 노동의 현장이 오히려 여유롭고 유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타작도〉는 지주의 땅에서 소작하는 농민들과 이들을 감독하는 마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마름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아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름은 지주의 토지가 있는 곳에 상주하면서 추수기의 작황을
조사하고 직접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징수하여 일괄해서 지주에게 상납하는 것을 주된 직무로 하고 있다.
그러한 직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마름은 지주의 입장에 서서 소작인들을 독려하기 마련이고, 소작인들은 피해 의식을 느끼며 싫든 좋든 간에 그의 요구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소작인과 마름은 현실적으로 볼 때 상호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마름의 요구에 의해 알곡을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곡식 밖에 가질 수 없는 소작인들로서는 마름이 놀고먹는 중간 착취자로 비칠 것이 당연하다.
{타작도〉는 이처럼 신분적 갈등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한 장면에 그린 그림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예컨대,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현실 부정의 미, 또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렬한 대립감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김홍도가 소작인들이나 마름의 어느 한편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적 갈등의 관계를 초월하는 해학과 중용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로세연계도
김홍도(金弘道)의 기로세연계도(耆老世聯圖)
비단에 담채, 137×53.3 cm, 개인 소장
〈기로세연계도〉의 화면 위쪽에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이고, 그 앞쪽에 높직하게 차양을 덮어 친 곳이 만월대이다. 대(臺) 중앙에 큰 잔칫상이 하나 놓여 있고, 이를 중심으로 계원들이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앉아 있다. 발문(跋文)에서는 계 모임에 참석한 계원의 수가 64인이라고 했지만 그림에는 66인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2명은 계원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 인물이 어느 인물인지 그림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저마다 일인용 술상을 받고 앉아 있는 계원들 앞에 시중 들고 있는 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앞쪽 계단 위에는 잔치의 흥을 돋우는 풍각쟁이들이 일렬로 앉아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그들 앞쪽에서 두 명의 무동(舞童)이 풍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회장 오른쪽에는 음식을 장만하는 가건물이 보이고, 그곳에서 음식을 내어 오는 아녀자들의 걸음이 바쁘다. 주변 마당에는 계원을 태우고 온 것으로 보이는 말, 그리고 계원을 따라온 것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서성이고 있다. 왼쪽 소나무 아래에는 계회에는 관심이 없는 듯 따로 춤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모를 둘러싸고 자기네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술꾼들도 보인다.
전체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250여명의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이, 마부, 그리고 저 혼자 술에 취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취객, 심지어는 벙거지를 쓰고 밥 빌러 온 거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는 연회장 주변 풍경은 동네 잔치를 방불케 한다.
선인기우도(仙人騎牛圖)
김홍도(金弘道)의 선인기우도(仙人騎牛圖)
지본 담채, 24×33.6 cm, 개인 소장
〈선인기우도〉는 탕건을 쓴 한 선비가 소 등에 비껴 앉아 고적한 교외(郊外)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선비의 자세가 앞쪽으로 약간 쏠린 것을 보니 졸고 있지 않으면 낮술 한 잔에 취해 있는 모양이다.
하늘 멀리에는 인기척에 놀란 물새들이 황급히 날아오르는데, 소등의 선비는 물새의 놀란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몰아의 경지에 깊이 빠져 있는 표정이다. 화면 가운데는 그림으로 못다 표현한 시심(詩心)을 담은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떨어진 꽃잎은 물위에 흐르고 한가로운 새는 울며 지저귀는데 아무 일도 없는 육지선이네”
(落花流水閒啼鳴 一事無干陸地仙)
경답도
경작도
고두놀이
노상파안
단야도
단원도
담배썰기
도선
무동
부상도
사궁도
시녀도
상박
서당도
타작
머슴둘과 일꾼들이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걸 태질이라고 하지요
단원의 그림에는 주제마다 묘한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듯한 아이까지 동원하여 태질하며고생하는 농투산이들과 대조적으로 의관정제하고 노는 양반들의 분위기가 이 그림에 잘 꼬집혀져 있습니다.
단원이 1950년대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 틀림없이 좌익운동을 했을법 합니다.
편석
당시에는 의식주를 모두 집에서 해결해야 했지요.
냇가에서 빨래들을 하고있습니다.
행상을 나가는 부부를 그렸습니다.
아이는 어미 등 옷속에 엎혀있고 팔 물건들은 이고 지고 했습니다.
다 팔아 본들 얼마 되지도 않을것 같은데.....
그시대에 가진것 없는 민초들의 삶의 고단함이 배어나오는 그림입니다..
자화상
단원 김홍도 화첩입니다.
아래에 38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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