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생활 수기

답동성당, 명동성당을 둘러보다

凡石 2015. 9. 10. 21:00

 

 우연찮게도 어제와 오늘('15.9.10)은 우리나라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 두 군데를 다녀왔다. 어제는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인천 답동 성당을 다녀왔고 오늘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인 명동 대성당을 다녀왔다. 이 두 성당은 189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답동성당은 전기협회에서 같이 근무한 최위원의 모친께서 별세하시어 답동성당 장례식장에 모셨기 때문에 조문을 갔었명동성당은 오늘 우리 회사에 입사한 직원 두 분과 같이 명동에 있는 청원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인근 성당을 산책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연 이틀동안 우리나라에서 내놓라 하는 역사적급 성당을 두군데나 둘러 보았다는 사실이 하도 기이하여 사진을 올려보고, 아울러 이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 관한 상식을 대충 살펴 본다.  

 

 

 

인천 중구 답동에 소재한 답동 성바오로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전면에 3개 종탑을 가지고 있고 각 종탑마다 8개의 작은 돌기둥이 8각의 종 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으며 각각의 종탑 아래에는 나무로 된 낡은 출입문이 있다. 벽면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으로 된 계단이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긴 아치형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 성당의 창문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성당 뒤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담쟁이덩굴로 덮혀있는 낡은 담장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듯 정감이 있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통칭 명동성당(明洞聖堂)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가에 있는 천주교 서울 대교구의 대성당이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기독교 교회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77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천주교 박해가 풀린 뒤1883년 조선 교구는 종현지역(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의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과 대지를 구매하여 신학생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그의 집은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87년(고종 24)에 본격적으로 성당 신축을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지만 천주교측은 공사를 강행했다

 

이후 저택을 허문 뒤 1892년 10월 5일 정초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온 유진 코스트 신부가 교회의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았으나 1896년 사망한 뒤 프와넬 신부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해 1898년 5월 29일 공사를 완료하고 성당의 축성식을 열었다. 원래 이름은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으나 1945년에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수배자나 시위대가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여 교황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조문 인파로 긴 행렬을 보였다.

-백과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