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그림, 사진

취묵헌 인영선

凡石 2009. 5. 7. 10:19

 

 

한바탕 먹잔치

취묵헌 인영선 선생의 遊戱翰墨周甲之錄을 보고
        

                                             임종현 (경기대학교 외래교수)

 

 

‘형식의 과학’인 미학은 역사적 경향과 사회적 제문제, 그리고 현대적 갈등을 모두 끌어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자연현실보다 아름답게, 아름다움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더하여 어쩌면 비자연화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규범으로서의 미의 가치는 논리의 행동과 지식의 규준에 대응하여 행동사유의 법칙에다 아취 있는 취향과 품위, 반복되는 풍유를 보탬으로서 온전함을 기하려는 것이다. 헤겔도 예술철학은 철학 총체의 일환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지난 5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취묵헌 인영선 선생의 주갑전이 열렸다. 필자가 전시장에 도착해서 느낀 것은 앞에서 말한 형식의 과학인 미학을 논쟁이 아닌 적극적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한 기분이었다. 미학이 말하려고 하는 무수히 많은 이론들에다가 아취 있는 취향과 품격, 그리고 풍유를 보탠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하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서예술의 기본인 추상같은 선질에다가 또 갖추어야 할 제요소, 즉 질삽(疾澁), 대소(大小), 경중(輕重), 소밀(疏密), 의정, 농담(濃淡), 고윤(枯潤) 등을 잘 맞춰서 구비시킨 정도의 것이 아니라, 그냥 썼을 뿐인데도 위에서 거론한 요소들이 하나도 빠진 것 없이 갖춰졌으며, 거기에 문기 넘치는 품격 또한 더해져서 보는 이들에게 글씨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선생의 작품제작 방식이 대체로 취필이 많고, 웅혼한 기상이 넘치는 것을 위주로 하다보니까 섬세하고 규구에 맞는 엄정한 아름다움을 띤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말이다.

 

“밥은 먹었냐?”
취묵헌 선생이 후배 서학도들이나 제자들을 만나면 늘 하시는 인사말이다.
요즘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선생은 꼭 그렇게 인사를 건넨다. 나도 30여 년 전에 향리에서 동네 아저씨들한테 흔히 듣던 그런 인사다. 그렇게 소박하고 꾸밈없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 취묵헌 인영선이라는 작가다. ‘서여기인’이라는 말을 꼭 동원하지 않아도 서예작품은 곧 작가이고, 작가의 사상과 행동양식은 곧바로 작품에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인들이 학문과 교양에 힘쓰라고 그렇게 외쳐댔던 것이 아닌가? 순박하고 온후한 성품과 문인적 기질이 작품 속에 녹아 있어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맑은 기운이 온전히 배어있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이다.

 

일찍이 완당선생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 되는 것이고 예서 쓰는 신묘한 비결이 되는 것이다”(須於胸中 先具文字香書卷氣 爲隸法張本 爲寫隸神訣)라고 하시고, 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예서 필법의 근간이 되고 흉중에는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 외형만 화려한 시기(市氣)는 걸러내어야 한다고 하면서 한예(漢隸)로서 속기를 제거하고 청고고아 하며 방경고졸(方勁古拙) 하지 않으면 글씨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화려해질 대로 화려해진 동한(東漢)의 예서만을 공부하면 그 안에 있는 기교와 외형에만 치우쳐서 서법의 근본은 사라지고 외식만 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계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경계를 철저히 받아들인 이가 취묵헌 인영선 이라는 작가인 듯 하다. 작품에 시기를 최대한 걸러내어 청고고아함을 최고의 미로 여겼을 뿐 아니라 고전에서 전해주고 있는 형식의 기준을 무시하는 듯하지만 철저히 그것들 안에서 움직이는 작가의 작품은 외형에만 치중하는 현대의 서예가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굳이 비유하자면 공맹보다는 노장에 가까운 무위의 서예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즉 학서의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고법에 충실하지만 막상 작품에 임해서는 전에 학습한 고법마저 잊어버리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 그 때 그 때의 다른 화선지와 먹, 그리고 붓에 따라 나오는 찰나적 일회성, 거기에 순간적으로 나오는 작가의 천부적 순발력 등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시장의 많은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림들은 서예적 획법에 탈속의 화법을 갖고 있어서 전시장을 찾은 화가들도 감탄을 할 정도였다. 그림과 글씨가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는 전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류와 문인적 학문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전시장을 나오면서 다음 전시를 기대해 보았다.

 

     

 

晩年惟好靜  萬事不關心

만년유호정  만사불관심

 自顧無長策  空知返舊林

자고무장책  공지반구림

松風吹解帶  山月照彈琴

송풍취해대  산월조탄금

君問窮通理  漁歌入浦深

군문궁통리  어가입포심

 

              酬張少府 (장소부에게)- 왕유(王維)

 

 나이 들어 그저 조용한 것이 좋아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네.

돌이켜 보건대 별 방책이 없는지라 고향에 돌아오는 수 밖에요.

솔바람에 허리띠 솔솔 풀리고 산 달은 거문고 타는 내 모습 비추네.

그대 궁통의 이치를 물으시는가. 갯가에서 들리는 어부의 노래 그 아니 흥겨운가!

 

 

 

 

盛熙明 《法書考》

 

翰墨之妙 通于神明 故必 積學累功  心手相忘 當其揮運之際 自有成書于胸中 乃能精神

融會ㅇ寓于書 或遲或速 動令規ㅇ 變化無常 

 

 

 

 

취묵헌 인영선 선생의 글씨가 담긴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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