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우리음악, 그 맛과 소리깔

凡石 2009. 4. 27. 21:19
우리음악, 그 맛과 소리깔 - 신 대 철(강릉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음악과)


Ⅰ. 우리 문화와 역사, 그리고 우리음악의 관계

음악은 문화의 소산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음악은 당연히 우리 문화의 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음악을 우리 문화의 하나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음악을 이렇게 바라보지 아니 하였다. 우리는 많은 경우 최종적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만을 우리음악의 전부인양 이해하여 왔다. 이와 같은 음악 이해의 방법이 잘못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완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음악을 우리 문화의 한 요소로 이해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문화는 오랜 역사를 흘러오면서 창조되는 개인적이고, 민족적이며, 또 국가적인 하나의 정신적 결정체이다. 그러나 엄청난 정치력과 군사력, 그리고 경제력은 갖추었어도 문 화력을 갖추지 못한 민족들이 이 지구상에는 의외로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으로 타민족과 국가에게 의지하였다. 그리고 얼마 아니 되어 힘 모두를 잃고 군소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 때 아시아의 거의 전부와 유럽 대륙의 일부를 말달리며 그 힘을 한껏 과시했던 나라, 나일강의 온갖 혜택 속에서 찬란한 고대문명을 일구어 냈던 나라가 그 예가 된다. 반면 2천년 이상을 나라 없이 방황하면서도 그들 정신을 통해서 계속 그들만의 문화를 이어왔던 한 민족은 이제 세계를 향해 각 분야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다. 혹자는 오늘의 지구는 이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문화의 힘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 후손에 물려주었음에도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세계에 바탕을 둔 문화보다는 물질적 척도에 근거한 세계를 탐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민족적 위기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한 모든 소산은 문화의 요소가 된다. 그러나 보통 인간의 정신활동에 의한 소산을 우리는 문화라고 한다. 반면 물질적 소산은 문명이라고 한다. 문화에는 보통 정신의 용어가 붙어 다닌다. 즉 정신문화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신문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예술은 문화의 하나요, 이 예술 속의 음악은 문화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음악은 우리 문화의 하나로 자리 매김 받아야 한다. 즉 수 천년을 이어 온 우리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평가되고, 또 교육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음악은 아름다운 소리의 울림을 통해 사람에게 미적 쾌감을 전달해 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음악이 사람에게 미적 쾌감을 전해 주지 못한다면 음악의 존재가치는 상실된다. 우리는 지금껏 음악을 이렇게 접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관점을 뛰어 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는 음악을 청각적 요소로만 파악하려는 협소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은 청각을 통해 즐거움을 창출해 가는 예술이지만, 음악에는 청각이 담을 수 없는 정신적 요소가 담겨 있다. 즉 음악에는 우리의 인식과 의식의 세계가 담겨 있다. 물론 우리음악에는 우리만의 정신세계인 인식의 세계가 존재한다. 음악을 이렇게 인식함이 바로 문화적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첩경의 하나가 된다.

우리음악은 우리 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세계에 기초하여 창조되어 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훌륭한 음악이 있지만 우리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담은 음악은 선조들이 남겨 놓은 우리음악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음악을 한번 더 즐기고,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진지하게 한번 더 반추해 봄은 우리만의 정신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확인된 정체성은 우리의 문화 속에 담긴 정신세계를 계승·발전케 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 우리음악과 우리 문화는 이와 같은 관계를 가지며, 바로 이와 같은 행동양태의 지속은 우리를 보다 나은 미래의 정신세계로 안내해 줄 것이다.

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는 그저 태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 국가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후대로 이어간다. 역사와 관계를 맺지 않는 문화는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국가나 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소중히 간직되고, 또 후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비록 부정적인 문화와 역사의 흔적이라고 해도 이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이 그와 같은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는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어 왔다. 우리 문화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어 왔음은 우리음악 역시 우리 역사 속에서 생성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음악은 우리 역사이해의 눈으로 바라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음악을 우리 역사와 상관해서 바라보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은 사정 속에서 당연히 우리는 우리음악이 우리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음악도 그 음악이 속한 문화와 역사로부터 유리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음악의 바른 이해는 이 삼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정도가 심하게 부정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삼자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한 우리음악 이해로의 접근은 외면되어서는 안될 새로운 음악이해의 세계이어야 한다.



2.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우리음악의 이해

어느 민족이나 국가이건 그 문화와 역사 속에는 긍정적인 요소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요소도 담겨 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이들은 이렇게 역사와 문화 속에 담긴 두 가지 모두를 교훈으로 삼는다. 즉 긍정적인 요소는 더욱 긍정적인 것으로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것은 반성의 눈으로 바라보아 이를 개선해 나가는 정신세계를 창조해 간다. 물론 우리도 이와 같은 지혜를 가진 민족이다. 그러나 사실 지금까지는 이를 등한시한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담긴 우리음악도 이렇게 잘못 대접해 온 면이 없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긍정적이고도 반성적, 적극적인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 우리의 전통음악, 즉 우리음악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고와 인식은 모든 삶을 발전적 방향으로 지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사고와 인식의 수준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우리는 상당부분에서 우리를 낮추어 보고 있다. 특히 서양의 것과 우리의 것을 비교할 때는 더욱 그렇다. 물론 우리음악을 바라보는 눈도 그렇다. 우리는 서양식 주거환경에서 서양식 사고와 행동양식으로 오늘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학문의 세계도, 예술의 세계도, 언어의 세계도, 거리의 환경도 거의가 서양식이다.


우리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서양철학만 배우고 있다. 동양철학과 우리의 철학세계는 거의 한자도 소개하지 않는 대학의 철학교과서, 피타고라스 정리는 있어도 '구고의 변'은 없는 수학교과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을 우리의 말로 번역한 서양속담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이다. '사랑의 이야기'와 '살인현장'은 몰라도 'love story'와 'killing field'는 너무도 잘 아는 우리이다. 퇴계와 율곡은 몰라도 데카르트와 볼테르와는 아주 친숙한 우리이다. 그리고 어린이가 보는 과학책에 수록된 공룡이 양 손에 삼지창과 칼을 들은 식사장면이 서양 어린이를 위한 그림이라는 사실 역시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우리이다.

오선보를 모르는 이는 아주 드물지만 정간보를 모르는 이는 비일비재다. 세종대왕이 작곡한 <여민락>이라는 음악은 몰라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는 아주 친숙한 우리이다. 그리고 몇 안되는 <여민락>을 아는 이들 중에서도 <여민락>은 예전 음악이니 현대화하자고 하는 이들을 여기 저기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들 가운데는 <여민락>보다도 더 오랜 서양음악의 그레고리안챤트를 즐겨듣는 이들도 많다. 물론 그들은 그레고리안챤트를 현대화하자고 하지도 않으며,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이 2-3백년전의 유럽인들을 위한 예전 음악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할 줄 모른다.

귀한 우리음악까지도 천박한 기생음악으로 매도하면서 서양의 싸구려 기생음악을 일상으로 즐기고 있는 이들이 많은 수의 우리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가장 귀한 음악의 하나로 알고 가르치면서도 우리의 가야금과 거문고를 애써 외면하는 우리를 보고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놀라는 외국인들의 우정어린 지적을 이상하게 바라본 이들이 우리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선보로 음악행위를 하는 만화를 그릴 줄은 알아도 정간보로 만화를 그릴 줄은 상상도 못한다.

일본을 욕하면서도 우리를 비하한 그들의 조작된 역사적 용어를 상용하며, 징기스칸을 우리의 영웅으로 우리는 노래하였고, 우리의 역사를 사대와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모습으로 이해한 우리였다. 우리의 입에는 조선이라는 말보다 이조라는 말이 더 친근하였다.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이 땅의 역사와 수학 여행지의 이모저모를 집중 학습한 후 이 땅에 수학여행 온 바다 건너 어린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에 놀라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시끄러운 놀이판식 수학여행을 그만 둘 줄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닌 역사의식의 한 단면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부끄러웠던 사실들을 훌훌 떨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바른 눈으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고 반추하여야 한다. 바람직한 미래는 과거의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긍정적 사고에 터 하여야만 우리를 찾아온다. 바로 이러한 사고에 기초한 행동이 우리 문화와 음악 이해의 단초가 된다.



3. 우리음악의 맛과 멋

서양음악은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서양음악은 아름답고 좋은 음악이다. 또 서양음악은 사랑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음악도 이러한 음악이다. 다만 우리는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음악의 이러한 면을 조금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음악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작은 출발이 될 것이다.


. 단선율로 된 수평의 음악 - 장자의 여유가 깃들인 음악세계 :

서양음악은 화성을 통해서 수직적인 음의 세계를 창출하지만 우리음악은 하나의 선율로 수평의 음악세계를 창조한다. 이는 서양의 그림이 색의 혼합을 통해 그 세계를 창출하고 우리의 그림이 많은 빈 공간 속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단일 기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단일문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를 생기게 하였다고 본다.

서양음악은 그들의 그림처럼 소리의 공간을 꽉 채우려 한다. 그래서 서양음악의 공간은 언제나 여러 음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음악은 우리의 그림처럼 많은 공간을 두고 있다.이러한 공간이 많음은 여유를 의미한다. 즉 듣는 이들이 마음으로 빈 공간을 채워 넣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은 오랜 여운을 남게 한다.


. 5음으로 구성된 음악, 때로는 3음만의 세계도 존재 :

서양음악은 보통 7음으로 구성된 음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5음으로 음악을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단 3개의 음만으로도 기막힌 아름다운 음악세계를 창출한다. 우리의 선각자들이 올드랭사인에 맞추어 그렇게도 목놓아 애국가를 불렀던 이유는 바로 올드랭사인의 음악적 구조가 우리음악의 5음 구조와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도처에 산재한 5음 음계의 구조 속에서도 유독 우리음악에서만 발견되는 3음만의 변화된 틀은 우리음악만이 지닌 특이한 세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5음과 3음의 우리음악 세계를 너무도 몰랐다. 5음과 3음의 우리음악을 7음의 서양음악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5음 음악은 즐기고 있다. 물론 베토벤의 9번 합창교향곡의 주제가 5음으로 되어 있음은 전혀 생각 밖의 일이다.


. 부드러운 곡선의 문화 속에 태어난 고운 곡선의 아름다운 울림 :

우리음악은 서양음악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예술문화가 곡선의 세계 속에서 오늘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초가집은 둥그런 곡선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초가 지붕 위의 박도 둥글다. 우리는 기와집도 선을 둥글게 처리한다. 우리의 미인은 보름달같이, 혹은 계란같이 둥근 미인이다.

우리의 그림도, 조각도, 춤사위도 모두가 둥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산수화, 석굴암의 본존불, 국립박물관의 두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승무는 곡선의 세계로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음악에서 농현, 혹은 농음의 이름으로 기묘한 곡선을 만들어 오게 하였다. 우리음악은 우리의 전통문화 곳곳에 나타나는 바로 이러한 따뜻함의 곡선적 표현의 음악적 양상이다. 반면에 서양음악은 우리음악보다 훨씬 직선적이다. 물론 우리음악에 직선적인 것이 없고, 서양음악에 곡선적인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음악에도 직선적인 것이 있고, 서양음악에도 곡선적인 것이 있다. 우리음악에는 곡선적인 현상이 서양음악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양음악을 연주할 때도 곡선적으로 연주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성악에서 잘 나타나지만 기악에도 나타난다. 물론 서양곡도 우리는 이렇게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다. 그만큼 우리는 곡선의 문화 속에서 곡선의 음악을 만들어 왔다.


. 농현은 곡선의 원천 :

우리음악의 곡선은 농현, 혹은 농음의 기법으로 표현된다. 연주를 하면서 음을 흘러내리고, 밀어 올리고, 흔들어 주고, 굴려주는 기법으로 만들어 내는 이 농현은 우리음악만의 감칠맛을 만들어 내 주고 있다. 그래서 불과 3음의 음악도 이 기법으로 말미암아 뛰어난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법을 잊어 가고 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진도아리랑과 몽금포타령의 농현은 그래서 옛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는 이 두 곡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민요와 우리음악을 서양식으로 연주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의 대부분이 이러한 우리의 기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오호, 애재(哀哉)라! 내 우리음악의 처지를 생각하며 지사의 마음으로 목놓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하노라!


. 강박 시작과 약박 종지 :

서양음악은 서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그 강약을 정하였다. 반면 우리음악은 우리말을 기준으로 하여 이를 정하였기 때문에 그 강약의 시종이 서양음악과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한국가곡을 서양식 억양으로 노래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우리말은 처음을 강하게 발음한다. 그리고 끝을 약하게 여민다. 그러나 서양의 말은 그 반대이다. 대부분이 관사와 전치사를 갖고 있는 서양말은 우리와는 강약의 어순이 다르다. 그들의 언어는 대개 처음을 약하게 하고, 다음을 강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에는 유달리 못 갖춘마디의 음악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서양음악 식으로 표현하면 갖춘마디의 음악이 훨씬 많다. 이러한 원칙은 성악이나 기악 모두에 다 적용된다.

이와 같이 우리말의 영향을 받은 우리음악은 처음을 강하게 시작하고, 끝을 살며시 조용하게 여미면서 종지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서양음악은 약박에서 약하게 시작하지만, 종지는 강박에서 아주 강하게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서양음악에 익숙한 이들은 우리음악의 종지를 종종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음악의 종지를 이상하다고 한다. 서양음악 식으로 우리음악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 자연의 소리를 존중한 소리 세계 :

서양음악은 소리 가공의 단계를 최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최소화한다. 우리음악은 자연의 소리, 혹은 자연의 소리에 가장 가까워지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소리 가공의 최소화라는 음악적 이념을 제공한 것은 자연과 친화하려는 우리 선조들의 철학세계였다.

이러한 소리의 형상 세계 속에서 우리는 박(拍)이나 축( )과 어( )의 나무를 두드리는 투박한 소리와 꽹과리와 징의 가공이 부족한 소리, 태평소의 거친 소리도 음악세계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판소리의 그 거친 탁성으로도 명창이 될 수 있는 열린 음악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서 등장한 현대음악을 제외한 서양음악은 언제나 소리 가공을 최대화한 고운 소리 중심의 음악이었다. 서양 성악의 벨칸토 기법은 이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이는 오늘날의 서양문명과 서양문화가 최대화한 가공의 단계를 통해 이룩된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한편 대부분의 우리의 현악기나 관악기의 소리가 나무와 명주실을 통한 따뜻한 울림의 소리인 것과는 달리 서양음악의 현악기나 관악기의 그것은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이다. 이와 같은 소리의 차이를 오직 서양적 자연과학의 발달 여부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보다는 소리를 향하는 우리와 서양인의 마음의 차이에서 이를 설명하여야 한다.


. 숨의 속도를 지닌 음악 :

서양의 음악은 심장의 박동을 기준으로 하여 그 빠르기의 세계를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음악은 호흡을 기준으로 하여 빠르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빠르기로 보아서 저들의 음악이 심장(心臟)의 음악이라면 우리의 음악은 폐장(肺臟)의 음악이 된다.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의 빠르기의 기준은 이렇게 달랐다. 둘 모두가 인체를 기준으로 하였지만 그 기준의 대상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 둘은 엄청나게 다른 음악적 속도를 만들어 온 것이다. 저들의 음악이 심장의 박동을 기준으로 하여 속도를 정했기 때문에 저들 세계에서 한 박자의 기준은 맥박의 한 번 뜀이었다. 즉 저들 세계에서 한 박자는 대략 1초 정도의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음악에서 한 박자의 기준은 한 숨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이를 설명하면 숨을 한 번 들여 마시고, 내 쉬는 시간이 박자의 기준이 되면서 한 번 들여 마시거나 내 쉬는 시간이 한 박자가 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약 3초가 우리음악의 한 박자였다. 물론 우리음악이나 서양음악 모두 현대로 오면서 음악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지만, 아직도 이 기준은 유효하다. 그래서 우리음악은 상대적으로 서양음악보다 느리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서양음악의 속도는 너무 절제 없이(?) 빠른 것이 된다.

숨의 음악은 우리에게 여유와 한가로움을 선물로 준다. 반면에 맥박의 음악은 우리에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촉급함을 선물로 준다. 바로 이 여유와 한가로움이 음악적 속도에서 얻을 수 있는 미학의 한 세계이다.


. 치고·달고·맺고·풀고의 장단 세계 :

우리음악의 대부분은 장단의 틀 속에서 울린다. 치고·달고·맺고·푸는 4단계의 틀 중 맺고·푸는 모습은 우리의 생체리듬과 생활리듬을 반영한 세계이다. 이러한 장단은 청중과 무대를 하나로 이어주는 조화의 장을 엮어 나간다. 그리고 장단 속에서 추임새가 귀한 음악적 생명력을 더해 주고 있다.

우리의 장단 세계는 기막힌 화(和)의 세계를 창출한다. 장단은 무대와 청중을 하나로 엮어준다. 장단을 엮는 이는 연주자에게는 지휘자요, 청중에게는 청중을 음악 속으로 끌어드리는 인도자이다. 사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즐긴 장단이 있는 많은 수의 음악에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였다. 지금처럼 냉랭하게 분리된 음악의 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무대와 객석의 하나됨에 크게 공헌하는 것은 바로 고수(鼓手)와 청중에 의한 추임새였다. 그러나 오늘날 추임새는 자꾸 잊혀져 가고 있다.


. 한(恨)의 세계를 신명(神明)의 세계로, 희로애락의 세계로 :

우리음악은 한스런 음악만은 아니다. 물론 우리음악 중에는 한과 슬픔을 담고 있는 음악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많은 경우 한을 신명의 세계로, 또 이를 승화한 차원 높은 희로애락의 음악세계로 이끌어 왔다. 그리고 슬픔은 세계적 미학의 틀 속에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음악이 비록 한의 미학을 담고 있지만, 이 한이 우리음악의 미학을 대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음악은 한보다는 보다 많은 부분에서 슬픔의 승화와 신명의 조화를 그 미학으로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경복궁타령>이다. 당시의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민중들은 <경복궁타령>을 조화와 신명의 세계로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현대인에 의해서 우리음악과 우리의 문화에서의 한이 유별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때로는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한의 세계가 정신 없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특히 부정적인 시각에 우리는 조심하여야 한다.

한이 비극을 의미하는 이상 우리는 비극이 미학의 세계에서 훌륭한 미적 요소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설령 우리가 이 세상의 비극과 한을 몽땅 소유하였다 해도 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비극은 이 세상 모두가 사랑하는 미학의 한 요소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희극보다 비극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고, 섹스피어의 희곡과 오페라에서도 비극의 가치가 더 인정되며, 안데르센의 동화도 비극으로 세계의 어린이들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