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서양음악사 통론] 15세기 ~ 20세기초까지

凡石 2009. 4. 27. 21:26

 

[서양음악사 통론] 15세기 ~ 20세기초까지

 

1.르네상스시대

 

 15세기 후반부의 음악[ 개요]

   르네상스(Renaissance)의 '재생'이라는 의미는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추구한 학문, 문화, 예술에 대한 이념적 복귀라고 해석될 수 있다. 고대(古代)로의 이러한 이념적 복귀는 인본주의적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과학과 문학, 예술 분야 등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15세기 후반의 음악은 부르고뉴 악파와 견주어 플랑드르 악파(Flemish school)라고 불리는 오케겜(Ockeghem), 오브레히트(Obrecht), 조스캥(Josquin)과 같은 국제적인 작곡가들에 의해 확립되고 발전되었다. 구텐베르크(Gutenberg)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이들의 음악은 인쇄되어서 전유럽으로 소개되었다고, 이에 따라 15세기를 주도한 네덜란드 작곡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에 초빙되는 사례가 잦았다. 빌라르트(Willaert)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 클레멘트(Clement)와 공베르(Gombert)는 독일 지역으로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머무르며 활동한 국가에서, 네덜란드 음악에 기초하지만 각 국가들의 민족적 특성을 반영한 음악들을 창작하여 새로운 경향의 음악을 이끌어 나갔다.

   이 시대의 중요한 음악형식은 여전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미사, 모테트, 샹송 등이었다. 특히 작곡가들은 가사의 선택이 자유로운 모테트에 더욱 큰 흥미를 가졌으므로 모테트가 많이 작곡되었다. 16세기 초반에 이르러 모테트는 가장 인기있는 종교음악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모테트의 창작기법은 기본적으로 미사의 창작기법과 동일하였다. 미사와 마찬가지로 정선율로 사용하기 위해 기존하는 선율을 차용하거나 그 밖의 다른 음악 재료들은 빌려서 인용하거나 장식하는 일이 흔하였다. 미사는 샹송을 이용한 패러디(parody) 기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인용 기법과 패러디는 16세기 미사에서 가장 유행했던 창작기법이다. 오케겜을 비롯한 15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 선호한 네덜란드 카논(Netherland Canon)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16세기 초반에는 짧은 악구에 의한 모방 기법이 일반적으로 애용되었다. 악상의 대조를 위한 방법으로는 전체 성부 중의 일부를 생략하고 2성부나 3성부만을 사용하여 전체 성부들과 대조를 이루게 하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종교음악은 4성부이지만 5성부나 6성부도 자주 나타났다. 각 성부들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며 음역은 낮은 음역까지 확대되어 전체적으로 음역의 폭이 넓어졌다. 세속음악은 대치적으로 3성부인데 윗선율을 노래하고 아랫성부들은 악기로 연주하는 독창 형태로 연주되었으며 때때로 샹송을 악기로 연주하는 기악음악 형태로 작품화되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교회선법에 기초하고 있지만, 최종 종지의 화성진행은 조성 체계로 볼 때 딸림조(dominant)에서 으뜸조(tonic)로 진행하는 음악이 대다수였다. 오브레히트의 에올리안(Aeolian) 선법에 나타나는 조성감, 무지카 픽타(musica ficta)에 의한 반음계적 화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끈음 등은 선법이 점차 조성적 진행을 내재하는 체계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플랑드르 악파의 마지막 주요 인물로는 조스캥을 꼽는다. 그는 주제를 사용한 모방 대위법 구조, 성부 간의 대조, 불협화음을 사용한 근대적 화성, 가사의 내용에 따라 음악적 표현을 달리하는 무지카 레제르바타(musica reservata)기법을 통하여 르네상스의 음악을 중세 음악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14세기경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文藝復興 運動)을 말한다. 르네상스의 어원적 의미는 그리스의 고전에 대한 '부활'이나 '재생'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세 기독교의 절대주의적인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규범에서 벗어난 인간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정치 · 사회적으로도 봉건사회가 무너져 가고 시민계급이 성장하여 인본주의의 정착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는 학문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켜 과학과 예술 분야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미술 분야에서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첼리니(Benvenuto Cellini),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등의 화가들이, 문학에서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마키아벨리(Niccoló Machiavelli),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등의 문호들이, 과학에서는 활판 인쇄술을 발명(1454년)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와 천동설을 부정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와 이를 발전시킨 갈릴레이(Galileo Galilei)등의 과학자들이 이 시대를 주도하였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로는 터키족의 콘스탄티노플(Constsntinople) 함락(1453),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 종결(1453),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서인도 제도의 발견(1492)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은 다른예술 분야처럼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점차 심미적인 인본주의 작품을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세속음악은 종교음악과 뚜렷이 구별되면서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였고, 종교음악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변화를 공유하면서 최상의 단계로 끌러올려졌다.

   과거 중세의 제한된 창작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독창성에 의한 자유로운 창작이 행해지면서 작곡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음악 요소를 동원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성악과 기악의 조합(조합), 폭넓은 문학의 영역으로부터 채택된 가사, 반음계적인 화성, 풍부한 음향의 대위법 등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자유롭고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이제 음악에서는 위대한 작곡가와 위대한 작품이 더욱 부각되었고, 이러한 작품들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발명에 힘입어 페트루치(Petrucci)가 만든 인쇄에 의한 악보로 널리 보급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교회 밖의 다양한 계층들에게도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폭넓게 제공함으로써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나타났으며, 궁정이나 상류계급층을 물론 시민계급에서도 음악으 후원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음악 입문서나 연주가를 위한 교본, 그리고 음악이론 서적들이 출판됨으로써 음악은 보다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2.바로크시대

[개요]

1. 바로크시대 음악양식 및 배경

 
바로크음악은 1600년경에 시작되어 1750년 바하의 죽음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의 음악에 적용되는데,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대를 음악사에서는 바로크(baroque)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시대의 그림과 건축에서 엿볼 수 있듯이 풍부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처리방법을 특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크(baroque)라는 용어는 당시에 보석으로 많이 쓰인 <일그러진 모양의 진주, 또는 비뚤어진 진주>를 뜻하는 포루투칼어의 "barroco"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처음에는 균형감과 형식미를 존중하는 르네상스미술에 대립된다고 보고 가치를 저하시키는 의미로 쓰여졌었다. 1600년 ~ 1750년의 기간은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서 시민문화의 시대로 접어든 변화와 모험의 시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는 근대 민주국가에의 사조가 예기되면서부터 전제군주제가 강화되었고,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상충되는 조류사이에서 개인주의 관념이 촉진된 시기였다.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강조한 것으로 음악 자체보다는 무대장치나 의상이 강조되는 궁정 오페라, 중상주의 시대의 부산물인 상업 오페라, 그리고 중산층 오페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루이 14세는 왕립음악원을 설립하는 등, 프랑스 오페라 중흥을 위해 대대적인 제도화 작업을 착수했다. 책임자로 륄리를 두었는데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되는 프랑스식 오페라 양식을 개발하는 등, 루이 14세의 비호아래 프랑스 전역의 음악생산과 소비를 한정, 통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악기가 현저하게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바로크시대의 개신교 문화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 개성의 강조는 개인적인 풍토를 조장하여 바로크에서 낭만적 경향을 강화했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음악 작곡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모든 형식의 예술은 군주나 교회에 의해 강요되는 인습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대신, 세속에 대한 예술가의 개인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 Fredrich Haendel, 1685-1759)은 개신교 정신에 기초를 두고 최상의 음악적 업적을 남겼는데, 종교개혁의 대담한 찬송의 선율들은 바하의 심오한 정신적 예술관을 확충시켰으며,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바로크시대의 윤리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 바로크시대 음악의 특징


약 150년 동안의 바로크 시대에 있어 음악은 초기(1580-1630), 중기(1630-1680), 후기(1680-1750)의 3양식 시대를 거치면서 의미 있는 변천을 겪었다. 악기들은 구조적으로 발달하여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장조와 단조의 조성 체계가 완전히 채택되었는가 하면, 기악과 성악이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오페라가 등장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처음으로 일반 청중을 위한 연주회가 개설되었다. 전반적으로는 음악 창작을 포함한 모든 예술활동에까지 새로운 개인주의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따라서 바로크음악의 여러 주요한 경향 중에서도 기법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성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초기 바로크시대에 단순한 선율에 화음 반주를 붙이는 모노디(monody)의 발생과 그 영향에 따른 오페라의 출현이고, 둘째는 건반악기 주자가 주어진 저음 위의 숫자에 의해 화음을 보충하여 나가는 숫자붙은 베이스(figured bass) 혹은 밧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의 기법이며, 세째는 중세 교회선법으로부터 장조와 단조의 조성체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밖의 특성으로는 연속적인 선율, 일정한 수준의 음향으로 움직이는 테라스식 강약(terraced dynamics), 베이스 성부에서 연속에서 반복되는 짧은 악구인 밧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 그리고 기교중시와 즉흥연주 등을 들 수 있다.

 

(1) 오페라의 출현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의 변천과 함께 일어난 중대한 변화의 하나는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몇 개의 독립적 성부로 되는 다성적 짜임새로부터 하나의 선율이 중심이 되는 화성적 짜임새로 의 구조적 변화였다. 성악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양식은 <모노디>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노래>로서 한 사람의 성부와 기악 반주를 위한 음악이라는 뜻이다.고도로 세련된 상태로, 다성음악은 바로크시대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조직이었지만, 모노디 양식의 출현과 관련 하여 1600년에 일어난 오페라의 발현은 모노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이론가와 작곡가들은 가사를 음악의 지배자로 취급하였는데, 초기 모노디 음악가들은 가사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다성음악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가사나 대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노디음악을 창조해 낸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르네상스 미술 활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있어 서도 새 시대의 문을 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음악애호가인 바르디 백작(Giovanni Bardi,1534- 1612)의 저택에서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르네상스 정신에 따라 고대 그리스의 무대예술 음악을 부활시키고자 협력하였다. 이 피렌체의 문필가, 화가, 음악가들의 모임을 <카 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살롱(salon)>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구성원중에는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인 빈첸쪼 갈릴레오(Vincenzo Galileo)를 비롯하여 야코포 페리(Jacopo Peri), 지울리오 캇치니(Giulio Caccini)등의 작곡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과감하게 모노디 양식을 채택하였다.

오페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의 훌륭한 결실이지만, 바로크시대에 있어서 오페라의 성립은 크게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념과 사상의 측면에서 피렌체의 카메라타 사람들이 인간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고대 그리스를 모범으로 시, 연극, 음악등이 종합 된 이른바 무대예술을 만들려고 의도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중세의 도덕극, 신비극, 수난곡 과 같은 종교 생활과 관계되는 연극과 , 화려한 가면극, 목가극 등과 같은 세속적인 연극이 음악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오페라는 1597년 시인인 리눗치니가 대본을 쓰고, 페리가 작곡한 모노디 양식의 << 다프네 - Dafne >>이지만, 그 악보는 대부분이 소실되어 전해져 있지 않다. 그 후 1600년 페리는 역시 리눗치니와 협력해서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 를 소재로 하여 << 에우리디체 _ Euridice >>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오페라 문헌이 된다. 피렌체 사람들은 고대 연극을 통하여 단지 대사의 의미를 강화시키고 그 진행을 늦춘다는 목적을 위해 음악을 개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표현 형태는 대사이면서 동시에 노래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한 작품에서의 중요한 사실은 오페라에 알맞은 낭송(recitativo)과 극적표현의 수법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미 한 성부를 악기의 화음반주에 의해 노래함으로써 독창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2) 숫자붙은 베이스

바로크 시대의 <숫자붙은 베이스>의 기법은 통주저음(through-bass), 혹은 <콘티누오(Continuo)>라고 하는데, 그것은 당시 음악가들이 기본적 화성에 익숙해져, 작곡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악보로 나타낼 경우 화음을 전부 기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작곡가들은 요구되는 화성의 표시를 베이스 음의 위 또는 아래에 숫자를 써넣고, 실제로 화성을 채워서 상세하게 다듬는 일은 연주자에게 맡기 것이다. 숫자붙은 베이스의 기법은 바로크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바로크시대를 흔히 <통주 저음 시대>라고 흔히 일컫는다. 숫자가 붙은 베이스를 연주하려면 적어도 두 사람의 연주자를 요하는데, 한 사람은 첼로, 더블베이스, 또는 버순고 같은 저음악기로 베이스 선을 연주하고, 또 한 사람은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혹은 류트나 기타와 같은 화성적 악기로 화음을 채워 넣으면서 연주하는 것이다.

 

(3) 조성체계의 확립

후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중세 교회선법으로부터 장조와 단조의 기능적 조성체계가 확립 되었다. 음악이 성악적 대위법으로부터 기악적 화성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은 화성적 체계의 단순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장조와 단조의 조성이 확립되면서 중심을 둘어싼 특정의 기능 관계가 성립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정지적 화음인 으뜸화음(tonic)과 활동적인 화음인 딸림화음(dominant)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음악을 형성해 나가는 원리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기본조로부터 대조적인 조로 갔다가 다시 기본조로 돌아오는 움직임은 음악적 구조의 형성에 중효한 원리가 된 것이다.(예를 들면, 1-5-1, 1-4-5-1, 1-4-1 등의 기본 화성 움직임)

장조와 단조라는 조성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진 중요한 기술적 진보는, 근사치의 음정을 실용적으로 고르게 나눈 음률인 평균률이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장조와 단조를 건반악기로 연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균률은 작곡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성적 가능성의 범위를 넓혔으며,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각 12개의 장조와 12개의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된 2권의 <평균률 클라비어곡집>을 작곡하였다. 따라서, 장조와 단조의 조성 체계는 평균률에 의하여 드디어 융통성 있는 표현 수단이 된 것이다.

 

3. 바로크시대의 음악가들


(1)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1567~1643)
몬테베르디는 순수한 종교음악 창작과 오페라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거장이다. 악기의 고장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만토바 시대를 거쳐 만년의 베네치아 시대에 이르는 동안, 몬테베르디는 공연음악으로서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 위하여 온갖 정열을 바친 작곡가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오페라 운동의 시조격으로 추앙되며, 이러한 열정은 대부분 베네치아 시대에 활짝 피워졌다. 그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오르페오>는 이후 무수한 작곡가들에 의해서 시도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채>의 원형으로서 음악사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죽기 직전에 작곡한 <포페아의 대관>도 초기 오페라 작품으로서 귀중한 실험정신으로 가득 차있다. 종교음악이나 마드리갈 같은 분야에서도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몬테베르디는 역시 오페라사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베네치아가 오페라 창작의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몬테베르디가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한 결과다. 그는 결국 이 도시에서 죽어 여기에 묻힘으로써 영원한 베네치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2)아르칸젤로 코렐리 Arcangello corelli (1653~1713)
비발디가 활동하기 직전에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을 이끄어나간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로, 17세기 이탈리아의 기악곡의 발달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코렐리다. 특히 바이올린이란 악기의 근대적인 주법과 작곡법을 정착시킨 장본인으로서 코렐리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그 영향을 받아 바로크 말기와 고전시대의 바이올린 음악이 크게 융성할수 있었다. 이러한 작곡법을 가장 극명하게 집악시킨 것이 12곡으로 되어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집(작품5)이다. 이 작품집은 바흐 이전에 쓰여진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바이올린 음악으로, 음악사에 혁혁한 빛을 던져준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중 끝곡인 제12번인 <라 폴리아 변주곡>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에 못지 않게 콘체르토 그로소(합주협주곡)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6도 코렐리가 이룩한 기악음악의 꽃이다. 이것은 협주곡이 점차 독주 협주곡으로 정착되기 시작하려는 무렵에 쓰여진 걸작들로서 코렐리의 음악적 결산을 총괄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만년에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60세로 별세했다.

 

(3) 헨리 퍼셀 Henry Purcell (1659~1695)
17세기후반 영국의 바로크 음악을 이끈 최고의 음악가이다. 바로크 뿐만아니라 영국 음악사 전체를 통털어 놓고 볼 때도 퍼셀만큼 뛰어난 작곡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36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애 그의 천재성이 다 피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꺽여져 버리고 만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퍼셀은 여러 장르에서 음악을 꽃피운 작곡가였다. 모든 음악작품들은 1680년부터 죽기까지 15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쓰여졌으며, 이 기간 동안에 작곡가로서의 퍼셀의 능력도 완전히 인정을 받아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종교음악, 기악곡, 관현악곡 등 다방면에 걸쳐 주목할만 한 작품들을 남겨놓았다. 철저한 폴리포니를 사용한 풍부한 악상과 자유분방한 판타지의 추구는 독특한 바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퍼셀은 당시대의 선구자적인 길을 걸어간 작곡가로 평가된다. 특히 성악분야에서 퍼셀의 능력은 크게 돋보였는데, 이와 같은 천재적인 작곡가를 영국은 지금까지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4)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5~1741)
음악사에 있어서 바로크 시대가 차지하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하다. 이 모든 종합적인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마무리 한 비발디의 이름은 곧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표상이요, 모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발디 없는 바로크는 의미가 없다고 할수있다. 비발디는 그 직전에 활동한 코렐리의 바이올린 음악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공로자다. 그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여서 유럽 전역을 누비며 순회 연주 활동을 펼쳤고, 대부분의 연주곡들은 비발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것이다. 비발디는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협주곡의 양식을 극한적으로 추구해 나간 작곡자였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600여곡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협주곡을 남겨 놓았는데, 그것들은 바흐나 헨델 같은 독일 바로크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오늘날 비발디는 주로 기악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활동한 당시에는 오페라와 종교음악 같은 성악곡에서도 훌륭한 걸작들을 남겨 그의 다재다능한 음악정신을 엿볼수 있다.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년을 고독과 가난으로 이어가다가 빈에서 빈궁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5)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바로크 시기의 대작곡가. 1701년에 법률학을 전공하기 위해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했으나,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아 노이에키르헤의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1704년에 조라우의 프롬니쯔 백작의 악장, 1708년에 아이제나하의 합창장을 거쳐 악장이 되었다. 이 때 바하와 친교를 맺고, 아들인 에마누엘 바하의 대부가 되었다. 11년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바르페서 교회의 악장이 되고, 이곳의 콜레기움 무지쿵을 위해 활동한 뒤, 21년에 함부르크로 옮겨 5개의 교회와 시의 음악 감독의 지위를 얻고, 작곡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텔레만은 당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그 인기는 바하나 헨델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또 방대한 수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서 기억된다. 작곡은 종교 음악뿐이 아니라, 오페라, 기악 등 모든 면에 걸쳤고, 작품량도 바하와 헨델의 전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정력적인 것이었다. 종교 음악에서는 수난곡 46곡,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또 40곡 남짓한 오페라를 썼다. 기악 작품에서는 관현악용 프랑스풍 서곡 600곡 이상 외, 다수의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3부로 된 《타펠 무지크(식탁 음악)》이 유명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수난곡《세상의 죄를 지고 죽으려는 예수》, 오라토리오《최후의 심판》, 오페라《핌피노네》,《타펠 무지크》등이 있다.

 

(6) 장 필립 라모 Jean Philippe Romeau (1683~1764)
디종 태생인 프랑스의 작곡가. 디종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나, 처음에는 화성학과 작곡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1701년에 이탈리아로 유학하고 돌아와, 고향과 각지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으면서, 1722년에 《화성론》의 명저를 써서 음악 이론가로 주목을 끌었다. 1723년부터는 무대용 소품을 작곡하다가, 수년 후에는 가극 작곡에 정력을 기울였다. 대표작은 《카스토르와 폴뤽스》,《에베의 축제》, 《나바르의 공주》등으로, 프랑스 가극사상에 있어서 륄리의 후계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륄리보다 충실하다. 클라브생 음악에 있어서는 《클라브생 모음곡집》등으로 쿠르랭과 함께 그 정점을 쌓아올린 중요한 작곡가로 손꼽힌다. 또 이론서 《화성론》에 의해 '근대 화성학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희가극)가 소개되었을 때, 이탈리아파의 루소와 논쟁한 것은 유명하다. 1745년에는 궁정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되었고, 만년에는 귀족으로 서품되었다. 작풍은 로코코적이나 바로크적인 깊이도 있다. 가극이나 발레에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극 《우아한 인디아인들》,《카스토르와 폴뤽스》, 《에베의 축제》-이중에 탕부랭이 유명하다. 《나바르의 공주》,《클라브생곡집》제1권, 제2권 《큐피》,《환희》,《경박한 여인》,《암탉》등이 있다.

(7)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drich Handel (1685~1759)
바흐와 같은해인 1685에 독일의 소도시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바흐보다 9년을 더 살면서 바로크 음악을 마무리 한 거장이다. 바흐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독일 바깥을 나서지 않고 생애를 마쳤음에 비하여, 헨델은 거의 전 생애를 떠돌아 살다시피 하면서 유럽 전역을 그의 음악 무대로 살았다. 그가 중점을 둔 분야도 바흐와는 달리 무대로 살았다. 그가 중점을 둔 분야도 바흐와는 달리 무대 음악에 큰 비중을 두었으며, 만년에는 오라토리오 창작에 전념하여 <메시아>라는 거대하고도 영감에 가득찬 일대 걸작을 남길수 있었다. 오라토리오 역시 헨델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할때 그는 철저하게 무대 음악을 추구한 바로크 작곡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 있어서의 헨델은 성악분야에 비하여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 다만 막간에 연주할 목적으로 쓰여졌던 합주 협주곡 같은데서 관현악법을 정확히 구사한 일례를 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이 헨델의 본령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국은 그의 제2의 고국이 되어 죽어서도 유해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입었다.

 

(8) 지우젭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
이탈리아의 피라노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며 바이올린의 명인. 처음에 파도바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그 사이에도 바이올린의 기교를 연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와의 결혼은 그녀의 보호자였던 추기경의 노여움을 사서, 아내와 함께 파도바에서 도망쳐서 방랑한 끝에 아시지의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음향학상의 문제를 연구하여, 바이올린의 구조를 개량하거나, 새로운 이론의 전개를 시도하기도 했다. 유명한 《악마의 트릴》이 작곡된 것도 이 때이다. 1721년에 파도바의 산 안토니오 예배당 관현악단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되고, 또 23년부터 25년에 걸쳐 뵈멘의 킨스키 백작의 초청으로 프라하에 체재하여,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파도바로 돌아간 그는 바이올린 학교를 창립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을 가르치면서, 음악 이론의 연구와 작곡에 힘쓰고, 틈을 내어 국내의 연주 여행에도 나섰다. 그러나 건강을 해쳐서 만년에는 작곡에만 전념했다. 연주법의 점에서는 코렐리의 흐름을 잇는 명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새로운 활 쓰기의 용법을 발명, 트릴 주법에 명인기를 발휘했다. 창작 활동은 1712년경부터 60년경까지의 약 50년간에 걸친다. 로코코적인 장식 과잉에서 출발하여, 차차로 청명 단순한 양식으로 향하면서, 실내 소나타, 협주곡, 신포니아 등 약 350곡의 작품을 썼으나, 거의 출판되어 있지 않고, 연주 기회도 별로 없다.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외에 교육자, 이론가로서도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에 기여한 업적이 크다. 주요 작품으로는 바이올린 소나타《악마의 트릴》,150곡의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140곡의 합주 협주곡, 신포니아, 실내악 등이 있다.

감정표현

   바로크 시대의 음악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은 작곡가에 따라서 대담하거나 격렬하게, 때로는 생소하게 표현되어서 전통적인 양식에 익숙해 있었던 작곡가들이나 이론가들은 이러한 표현양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지보적인 작곡가들은 선율, 리듬, 화성구조 등을 변화시켜서 가사를 중요시하는 감정표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이들은 감정표현을 위한 창작의 순서를 inventino(주제를 찾는 것), dispositio(작품을 계획하고 윤곽을 잡는 것), elaboratio(작곡하고 장식하는 것) 등 세 단계로 진행시켰다. 이와 같은 창작 과정을 통한 감정의 묘사는 성악음악 뿐만 아니라 기악음악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바소 콘티누오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는 바로크 음악에 붙여진 지속적인 베이스 성부를 말한다. 이 베이스 성부는 바로크 초기에 태어난 단성부 음악(monody)에 붙여지면서 점차 모든 음악으로 확산되었다. 16세기가 끝날 무렵 'bassus pro organo(오르간 베이스)'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베이스를 후에 'basso sequente(연속되는 베이스)'라고 불었는데 이것이 바소 콘티누오의 원형이다. 바소 세쿠엔테는 다성음악에서 연속되어 모방하는 성부들 중에서 가장 낮은 성부를 말한다. 오르간은 이 성부 위에 즉흥적으로 화음을 붙여 연주하게 된다. 즉 소프라노가 먼저 노래하고 알토가 잠시 후에 모방하면 알토가 가장 아랫성부가 되고, 테너가 알토를 모방할 때는 테너가 가장 아랫성부가 되며, 마지막에는 베이스가 가장 아랫 성부가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최초로 알려진 바소 세쿠엔테는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oggio, ca. 1540~1592)가 쓴 복합창 모테트 곡집인 [Ecce beatem lucem]이다. 바소 세쿠엔테는 지속적인 베이스와 즉흥적인 화성구조를 만들었으나 성악 선율과 베이스를 독립시키지는 못하였다. 1600년경에 성악선율과 베이스 선율을 독립시키면서 즉흥적인 화성으로 연결시킨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베이스는 작품 전체에 계속되기 때문에 'basso continuo(지속적인 저음)'나 'through bass(전체적으로 연주되는 저음)'라고 한다. 바소 콘티누오는 숫자에 의해 화성을 지시 받았다. 화성표시를 위하여 작곡가들은 베이스 선율 아래에 아라비아 숫자나 부호를 붙였다. 다시 말하면, 이 숫자들은 베이스 음 위에 붙여질 음정을 알려주는 것이다. 초기 바로크 음악에는 베이스 선율 아래에 숫자가 붙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 때에는 연주자가 임의로 화음을 붙였다.

 

   바소 콘티누오를 처음 연주했을 당시에는 건반악기만으로 반주를 하였으나 곧 현악기와 관악기의 저음 악기(violin, cello, viola da gamba, bassoon)들이 첨가되었다. 비아다나(Ludovico Grossi da Viadana, ca. 1560~1627)가 [Cento concerti ecclesiastici(백 개의 교회 협주곡,1602)]의 서문에서 자신이 바소 콘티누오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작품은 모방적인 다성음악이었고 기능은 바소 세쿠엔테와 유사하여 그의 주장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다만 바소 콘티누오라는 용어를 출판물에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은 비아나다로 알려진다. 비소 콘티누오를 사용한 초기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카발리에리(Emilio del Cavalieri)가 쓴 이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모방대위법을 탈피하여 극적인 요소를 가진 새로운 화성음악으로 바소 콘티누오를 사용하고 있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제6집]은 바소 세쿠엔테를 사용한 마드리갈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몇 곡의 마드리갈은 바소 콘티누오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7집]의 마드리갈은 전부 바소 콘티누오를 사용하고 있다.

  바소 콘티누오는 바로크의 전 시기 동안 사용되었고, 180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계속 잔존하였다. 그러나 바로크시대에도 선적인 대위법 형식인 모테트나 마드리갈에는 항상 바소 콘티누오가 나타나지는 않았고 일부 기악음악에는 바소 콘티누오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독주 건반악기와 류트 음악에는 바소 콘티누오가 필요하지 않았다. 비로크 시대를 '바소 콘티누오의 시대'라고도 부르지만, 실제로 바로크 시대는 르네상스의 대위적인 다성음악과 항상 공존한 시대였다. 대위법의 절정으로 일컬어지는 바흐의 음악은 어떤 면에서 르네상스 음악의 연장이었고 바로크 바소 쿤티누오와 대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바로크 시대를 바소 콘티누오의 시대로 정의하는 것도 어려움이 있다.

 

조성과 리듬

   장.단조의 조성체계는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바로크 후기까지도 장.단조 체계가 선법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16세기 글레리안의 이오니아 선법은 C장조와, 에올리아 선법은 A단조와 음계 구조가 같다. 그러나 선법은 음악 구조를 선율과 음정의 관계로만 보았고 화성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오니아와 에올리아가 직접 장.단조 음계로 바뀌어 지지는 않았다. 바로크 시대에 들어와서 바소 콘티누오에 의해 선율이 화성의 토대 위에 서게 되었고 이러한 기법은 화성진행에 따른 조성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바로크 리듬은 강.약의 규칙적인 리듬이 반복되는 춤곡의 리듬 유형과 가사에 따른 자유로운 리듬을 추구하는 극음악의 리듬 유형을 음악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바로크 음악의 이원성은 전통적인 리듬과 진보적인 리듬을 공유한 바로크 리듬에도 적용된다 하겠다.

 

 

3.전고전주의 음악

[개요]

   전고전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8세기 초엽은 유럽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계몽주의와 인본주의 운동의 물결은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는 이전 시대에 맹목적인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경험에 의한 이성과 지식을 중요시하는 풍조를 가져오게 하였다. 프리메이슨단(Freemason團)의 '우애 운동'은 유럽과 내륙 전역에 퍼졌고, 이러한 인본주의와 자주적인 정신은 프랑스와 북미의 혁명을 유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중산층이 급격히 부상하여 문화와 예술에 대중의 참여가 나타났고, 과학의 발달은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음악을 배울 수 있는 악보들을 널리 보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밖에도 18세기에는 악기의 연주법에 관한 논문들이 발표되어 연주법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고, 비교적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음악 간행물은 모든 종류의 음악소식을 전해 줌으로써 관객의 수를 늘리는데 공헌하였다. 1720년 이후에는 공공연한 연주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에서는 대중 음악회도 자주 열렸다.

 

    전고전주의 음악이란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성숙된 고전음악 양식이 자리잡기 전에 이들 음악의 토양이 되었던 음악을 말한다. 간결하고 우아함으로 대변되는 갈랑 양식(galant style), 감정표현을 추구하는 엠핀트자멜 양식(Empfindsamer Style)은 이 시대 음악양식의 상징으로 여러 작품에 반영된다. 갈랑 양식은 단순한 선율, 짧은 악기, 복잡하지 않은 화성구조로 된 음악을 추구하였다. 알베르티 베이스(Alberti bass)나 단순한 양식, 16분음표로 된 셋잇단음, 롬바르드(lombard) 리듬, 전과음(appogiatura), 그리고 악상 대조를 많이 사용한다.

    1750년 이후 북독일에서는 갈랑 양식에 이어서 엠핀트자멜 양식을 구축하는데 이 양식도 갈랑 양식과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가벼운 화성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C. P. E. 바흐의 음악은 엠핀트자멜 양식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엠핀트자멜 양식이 강화된 표현은 질풍노도(Sturm und Drang)양식에서 만들어진다. 이 양식은 문자대로 강렬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묘사한다. 질풍노도 양식은 특별히 오페라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전고전 시대는 틀림없이 새로운 음악사조의 시대이지만, 이전 시대 음악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유럽형식의 가곡, 다카포 아리아(da capo aria), 후렴부가 있는 협주곡 악장, 2부분(binary) 형식, 콘티누오 반주 등은 전고전 시대 뿐만 아니라 고전 시대의 초기까지도 자주 나타났다. 전고전 시대의 새로운 형식의 도전은 2부분 형식을 확대하고 수정하면서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을 점차 자리잡게 하였고, 바로크의 교회 소나타는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로 대체되었다.

    초기의 소나타는 1735년 이후 독주 건반악기를 위하여 알베르티(Domenico Alberti), C. P. E. 바흐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들에 의해서 다수 작곡되었다. 처음의 몇몇 소나타는 2악장이었으나 1740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이 3악장(활기찬 알레그로, 서정적인 안단테, 춤곡 형식의 피날레)으로 되어 있다. 소나타 형식은 전고전주의 작곡가들이 2부분 형식을 수정하여 만든 순환 2부분(rounded binary)형식에서 유래된다.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비발디가 이룩한 형식구조가 계승되었다. 하프시코드와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은 J. S. 바흐가 처음인데 이 작품은 비발디의 협주곡 중에서 몇 곡을 편곡한 것이다. 전고전시대 협주곡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C. P. E. 바흐는 전통적인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협주곡 뿐만 아니라 교향곡에서도 C. P. E. 바흐 작품들은 고전주의의 문을 열고 하이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고전주의의 또다른 유명한 협주곡 작곡가로 J. C. 바흐(Johann Christian Bach)를 들 수 있다. J. C. 바흐는 대중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최초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인물이다. 그의 협주곡 창작 기법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은 오페라의 서곡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서곡은 점차 오페라의 서곡과 연주회용 서곡으로 나뉘어 작곡된다. 독립적인 교향곡의 발달은 삼마르티니(G. B. Sammartini)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의 교향곡은 바로크 양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지만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여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3악장으로 구성된 그의 교향곡은 소나타 형식으로 된 빠은 첫 악장으로 시작해서 반음계와 장식음이 붙은 느리고 서정적인 2악장, 빠른 템포로 효과적인 끝맺음을 갖는 마지막 악장으로 되어 있다. 악기 편성은 바로크 소나타를 연상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콘티누오를 사용하지 않고 호모포니의 기초 위에서 전고전주의 양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신포니아(sinfonia)는 만하임(Mannheim), 비엔나, 파리 등 유럽의 중요한 도시로 전해져서 성숙한 교향곡의 정착으로 이어진다. 슈타미츠(J. Stamitz), C. P. E. 바흐, 몬(Monn), 바겐자일(Wagenseil), 고세크(Gossec) 등은 각 지역별로 초기 교향곡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작곡가들이다.

    전고전 시대에는 바로크 시대의 정가극(opera seria)이 빚어낸 문제점을 제거하려는 오페라 개혁 운동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오페라 대본가 메타스타지오(Metastasio)는 가수의 성악적 기교만을 추구하는 아리아 위주의 대본을 썼고, 이로 인해 오페라의 종합적인 예술성은 무너졌다. 나폴리에서 교육을 받은 하세(Hasse), 욤멜리(Jommelli), 트라에타(Traetta)와 같은 작곡가들은 이와 같은 구시대에서 벗어나 갈랑 양식으로 쓴 이탈리아의 정가극을 유럽 전역에 소개하였다. 특히 욤멜라와 트라에타는 오페라 개혁을 시도한 최초의 작곡가들이다. 정가극의 막간에 나타나던 인터르메초(intermezzo)는 전고전 시대에 이르러 희극 오페라로 등장한다. 페르골레지(Pergolesi)의 는 인테르메초로 탄생해서 독립적인 희극 오페라가 된 작품이다. 오페라부파(opera buffa)와 인테르메초는 18세기에 동시에 발달하였다. 희극 오페라의 특징은 중창을 자주 사용하고 베이스(Bass)를 주역으로 하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든 베우들이 다 나와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페라 부파는 점차 희극적인 바탕을 유지하면서도 비극적인 요소나 비애적인 또는 감정적인 요소를 가진 대본을 사용하였다. 이런 종류의 희극 오페라를 드라마 지오코조(drama giocoso)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는 어릿광대극과 보드빌(Vaudeville)에서 진화된 오페라이다. 처음에는 음악이 다소 첨가된 연극에 불과했으나 1735~1750년 사이에는 오페라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이탈리아의 인테르메초가 1752~1754년 사이에 상연됐는데 이것은 부퐁 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어느 한편에도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로 인하여 희극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오페라 코미크는 자주 상연되었다. 오페라 코미크는 단순한 희극적 내용에서 점차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다루면서 대본의 내용이 희극에 국한되지 않았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곡가 그레트리(Gretry)는 오페라 코미크와 정가극의 발달에 모두 공헌하였다. 특히 그의 오페라 은 구원 오페라(resque opera)의 선구적 작품이다.

    영국은 처음에는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고 자체의 오페라를 개발하지 않았으나 1728년에 게이(Gay)의 의 성공을 계기로 대중적이고 풍자적인 소재를 대본으로 하는 발라드 오페라(ballad opera)를 활발히 제작하였다.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와 프랑스의 Comedies melee d'ariette는 북독일의 징슈필(Singspiel)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징슈필은 오랜 전통이 있었다. 징슈필도 다른 유럽국각들의 희국 오페라와 유사한 면이 많으나 독일의 민속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대본가 바이세(C. F. Weisse)와 작곡가 힐러(A. Hiller)는 징슈필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징슈필은 계속 발전되면서 모차르트를 지나 19세기의 독일 낭만 오페라에 병합되었다.

    전고전 시대에도 상당한 양의 세속 가곡이 작곡되었다. 프랑스의 세속 가곡으로는 로망스(romance)를 들 수 있는데 로망스는 독자적인 가곡으로도 불려졌지만 당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오페라 코미크에 차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로망스 이외에도 프랑스의 시인들은 이미 기존하는 건반 악기 작품에 가사를 붙여 독창 가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독일에서도 유행했는데 1730년대 중반에는 가곡을 수록한 [슈페렌테스 (Sperentes)모음집]과 기타 모음집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곡들은 독립적인 음악 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18세기 초반은 '가곡없는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1750년 이후 베를린에서 벤다(F. Benda), C. P. E. 바흐, 그라운(K. H. Graun)을 중심으로 많은 가곡이 작곡되면서 가곡의 인기가 높아졌다.

 

    교회음악은 일반 세속음악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창작되었다. 구양식(stile antico)이 주된 작곡양식이지만 오페라 양식이 교회음악에도 침투되어 혼합양식 (Stylus mixus)을 만들어 냈다. 특히, 남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지역은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왕들은 유사한 대규모의 그랜드 모테트(grand motet)가 융성했고 이러한 모테트는 1725년 이후 Concert spiritual에서 연주용 곡목에 포함되기도 했다. 독일의 루터교회 지역에서는 여전히 코랄 모테트(chorale motet)가 조금씩 작곡되었으나 모테트의 인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화되었고, 1750년 이후에는 더 이상의 발전이 나타나지 않았다.

 

 

 역사적 배경

   전고전주의는 엄격히 말해서 바로크 시대가 끝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전고전주의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계몽주의이다. 1685년경부터 일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맹목적인 종교의 권위와 교리를 거부하고 인도적이고 인본적인 사회적 풍조를 가져오게 하였다. 인간의 자유스러운 사상이나 존엄성을 강조하고 교육과 과학적인 실험, 경험적인 철학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였다. 인도주의(人道主義)의 이상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구체화되었고 관용과 형제애에 대한 이상은 프리메이슨(Freemason)단의 '우애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프리메이슨 운동은 1717년에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지부가 설치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정치가 B.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워싱턴(George Washington), 철학자 레싱(Lessing), 문학가 클롭슈톡(Klopstock)과 쉴러(Schiller), 괴테(Goethe), 스위프트(Swift) 그리고 작곡가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계몽주의의 파급은 프리메이슨 운동 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에도 큰 영향을 주어서 영국에서의 로크(John Locke), 뉴턴(Isaac Newton), 흄(David Hume), 프랑스의 몽테스키외(Montesquieu), 볼테르(Voltair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이탈리아의 알가로티(Francesco Algarotti)와 같은 인물들을 낳았다. 계몽주의는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산층 계급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악기의 보급과 악보의 출판이 증가되었다. 연습곡이나 교칙본 등 연습을 위한 method가 개발되었고, 아마추어를 위한 음악책이나 음악저널, 연주에 대한 평론 등이 등장하였다. 17세기의 상류사회귀족들을 위하여 지어진 연주회장들은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콘서트(concert)'라는 용어 역시 1750년대 후반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672년에 바니스터(John Banister)가 자신의 집에서 일반인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공공연주회가 열리게 되었으나 체계적으로 조직화되고 대중화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720년대에 이르면서 대중 연주회는 보다 활발해져서 프랑크프르트에서 활동하던 텔레만이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였고, 함부르크에서는 정기적으로 텔레만의 연주회가 열렸으며 힐러(J. A. Hiller)도 음악애호가를 위한 연주회를 시리즈로 개최하였다. 이러한 작곡가들의 활발한 음악 활동은 1781년에 Gewand haus konzerte의 설립을 앞당겼다.

    1725년에는 프랑스의 오보에 연주자 필리도르(Anne Danicam Philidor)가 3년 동안 정부와 계약을 맺고 Concert spiritual이라는 연주회 단체를 세웠고, 음악가의 후원자로 알려진 푸플이니에르(La Poupliniere)는 1731년부터 약 30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열었다. 미국에서는 1731년 보스턴에서 영국 형식의 음악회가 처음 열렸다.

 

 

 4.고전주의음악

  [개요]

   음악에 있어서 '고전(classic)'이라는 의미는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일반적인 분류와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동한 1750∼1820년경까지의 음악에 적용되어 왔다. 다른 음악사적 시대 분류도 그렇지만 고전음악을 구분하는 이 시기도 엄격히 적용될 수는 없다. 고전적이라고 할만한 음악양식의 특성은 이미 바로크 말기부터 나타났으며 상당수의 바로크 시대 음악형식은 고전주의 시대에 와서도 명칭만 달라졌을 뿐 내용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를 정의할 수 있는 음악적 특성이 불명확하다는 말은 아니다.

 

    고전 시대의 음악을 정의할 수 있는 배경은 이 시대의 철학사상으로부터 기인된다. 당시의 사회적 추세는 계몽주의 철학으로 시민권이 향상되고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나 예술 분야도 과거처럼 종교나 특정인만이 향유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과 균형의 조화를 추구하는 음악을 지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위적인 음악보다는 호모포니적인 음악을 선호하였고, 개성적인 감각의 성악음악보다는 기악음악이 인기가 있었다. 이제 작곡가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음악 기법을 창안하는 노력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이라는 정격화된 형식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형식의 범주 안에서 단순 명료하고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음악이 주가 되어서 종교음악 분야는 음악 사상 처음으로 침체 국면을 맞게 된다.

    음악의 객관적인 형식을 중요시한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기악음악을 선호하게 되었고 기악음악을 통하여 정격화된 형식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교향곡에는 악장의 개념과 소나타 형식을 정착시켰는데 이는 다른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관현악의 편성도 근대화되고 악기도 더욱 개량되어서 장려한 교향곡의 음향을 창출해 내었다. 실내악 부문도 발전을 가져왔는데, 특히 현악4중주가 인기가 있었다.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로는 이 시대에 와서 구조적으로 개선된 피아노의 발전에 힘입어 피아노 작품이 두드러진다. 협주곡에서는 독주 부분이 합주 못지 않게 중요성을 띄면서 강한 대조 효과를 만들어 고전 협주곡의 새로운 특성을 과시하였다.

 

    성악음악에서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들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커다란 발전은 없었다. 특히 고전 시대에 이르면서 종교음악은 침체되어 바흐와 같은 대작곡가도 잊혀지고 있엇다. 그러나 하이든의 <천지창조>,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등과 같은 걸작들이 이 시기에도 꾸준히 작곡되었다.

    바로크 시대 말기부터 이탈리아 나폴리 오페라가 극의 내용을 무시하고 성악적 기교만을 과시함으로써 야기시킨 문제점은 전고전 시대부터 서서히 제기되었고, 고전 시대에 이르러 오페라 개혁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 운동은 오페라의 종합적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풍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 시대에 가장 빛나는 오페라 작곡가는 모차르트이다. 음악의 형식적인 개혁이나 독창성은 없었으나 그의 천부적인 창의력의 산물인 <마적>,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등은 오늘날에도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배경

고전주의 시대로 분류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이성의 시대와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이 시기는 칸트(Kant)이외에도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레싱(Lessing), 아담 스미스(Adam smith)등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철학사상이 점철된 시기였다. 자유주의 사상과 세계주의적인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시민정신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촉발시켰고, 과학 분야에서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셉2세는 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 형제애, 종교의 관용을 증진시켰고 전시대까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과 문화를 대중이 보다 폭 넓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대의 화가로는 바토(Watteau), 고야(Goya), 다비드(David) 등이 유명하였다. 음악은 교회와 궁정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점차 생활화되었고,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많이 생겨났다. 18세기 말에 접어 들면서 여러 도시를 돌며 연주하는 직업연주가들이 많았고 연주회에는 입장권이 등장하였다. 음악이 이처럼 대중화되었어도 교회와 궁정의 후원없이는 아직도 자립은 힘든 상태였다. 교회는 여전히 음악의 중요한 후원자로 남아서 연주와 창작활동을 도왔고, 궁정과 귀족의 후원은 계속됐으나 음악가들의 독립적 활동에 대한 후원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특징

   고전주의 음악은 1750년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전고전 양식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만 성숙된 고전음악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양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빈 악파의 시대에 와서 시작된다. 빈 악파의 음악과 함께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은 일정한 형식과 규칙을 필요로 하였고 이에 따라 작곡가들은 소나타 형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소나타 형식은 다악장 음악의 구조적인 원칙을 제공하면서 고전주의 음악의 주된 음악형식이 된다. 바로크 시대의 장려하고 복잡한 음악을 피하고 균형과 절제가 강조되는 단순 명료한 음악은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이상이 되었다. 대위법은사라지지 않고 대조나 발전을 위해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호모포니 구조를 음악 구성의 기초로 삼았다. 새로운 화성재료는 언제나 명확한 화성을 사용하였고, 조(調)와 조 사이에는 화성적인 조건을 전제로 하였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교향곡, 소나타 등을 포함한 기악음악이 성악음악에 비하여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부분의 기악음악은 바로크 시대의 기악음악에서 유래되어 고전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변모되고 발전되었다. 오페라는 개혁 운동이 있었지만 획기적인 변화는 없었다. 다행히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있어서 고전 시대의 오페라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5.낭만음악

  역사적배경

    문학과 예술의 낭만주의는 1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거의 한 세기를 풍미하였다.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이 한세기 동안에 세계는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은 유럽사회의 산업혁명을 더욱 촉진시켜서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러한 시대의 변천 과정 속에서 성립.발전되었고, 급기야는 냉혹한 대립을 가져야 했다. 사회주의의 개척자이자 대표적 인물인 마르크스 (Karl Marx)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 (Ideology)를 주창하였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이념논쟁들은 국가 간의 불화뿐만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권 다툼을 몰고와서 크리미아 전쟁 (Crimean War 1854~1856), 미국의 남북 전쟁 (Civil War, 1861~1865), 보불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을 야기시켰다. 인간성의 회복은 자유로운 사고,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고, 이성과 감정의 표현방식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더욱 뚜렸해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유와 억압, 이성과 감정, 과학과 종교 간에 마찰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미술에서는 사실주의에 이어서 인상주의의 태동이 있었고 문학에서는 인상주의와 관계를 이루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문학과 예술 이외의 철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사상을 주창한 철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 시대의 중요한 인물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미술 : 세잔느(Cezanne), 마네(Manet), 모네(Monet), 드가(Degas), 르누와르(Renoir), 로댕(Rodin).

문학 : 상징파 시인들로는 베를렌(Verlaine), 말라르메(Mallarme'), 랭보(Rimbaud), 디킨스(Dickins), 하디(Hardy), 쉴러(Schiller), 괴테(Goethe), 리히터(Richter), 하이네(Heine), 위고(Hugo), 플로베르(Falubert), 에머슨(Emerson), 롱펠로(Longfellow), 포우(Poe) 등이 있다.

철학 : 헤겔(Hegel),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니체(Nietzsche)

   

낭만음악의 정의

   낭만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프랑스의 'le roman (소설,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이것은 중세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서사시(romance)이다. 엄격히 말해서 음악의 시대적 분류에 낭만이라는 용어를 적용시킨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19세기의 음악이 절대적으로 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면 낭만음악의 용어적 타당성을 인정하게 된다. 대부분의 음악사적 시대 분류가 전(前)시대 음악의 거부 또는 개혁에서 이루어지지만 낭만음악은 이러한 분류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1810년 경부터 '낭만'이라는 용어가 음악에 등장하였고, 베토벤 음악을 시작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은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의 거부가 아니라, 확장.변화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의 계승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독일음악에 낭만적인 요소가 융화되면서 새로운 서정성을 함유한 음악으로 탕바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전고전시대의 C.P.E Bach의 작품이나 하이든의 일부 교향곡들과 모차르트 말기 작품에는 이미 낭만주의적인 서정성이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모든 음악에 단지 서정성과정감이라는 특성만 있으면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귀착하게 되며, 서정성만으로 낭만주의 음악을 정의한다면 시대와 작곡가를 불문하고 낭만주의 음악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물론 낭만주의 음악은 서정성과 정감을 음악의 기본이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단정지울 수 있는 요소들은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시대적 분류를 기준으로 해서 1820년에서 1900년까지의 음악을 낭만주의 음악으로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특징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형식 안에서 그들의 음악을 찾았지만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음악을 위해서 형식을 찾았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 속에 보다 자유로운 형식과 구조를 맞추어 나갔으며 정감에 대한 보다 힘있고 강한 표현을 추구했으며, 때로는 내면적인 사고와 감정, 심지어는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낭만주의의 정감론은 단지 아름다운 서정성 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와같은 다양한 표현을 위해서 형식을 이탈하기도 하고 수정 또는 유지하기도 하였다. 형식 뿐만 아니라 음색, 화성, 리듬에서도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개성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낭만주의 음악의 본질은 어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학적 내용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고전주의 작곡가들 처럼 순수한 음 자체에서 음악의 자료를 찾는 절대음악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주제나 이념을 문학이나 미술 등 음악 외적인 자료에서 찾는 표제음악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많은 낭만주의의 작곡가들은 폭넓게 독서했으며 미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울러 이들이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이든지 창작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자연,사랑,꿈,밤,달빛 등 낭만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음악자료들도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와자료들은 이 시대의 작곡가들의 주관적인 창작기법에 의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추구한  형식논리는 자유로운 형식의 이탈과  수정에서 새로운 형식의 창조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주기법의 개발도 가능하게 하였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은 표제음악을 시도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표제교향곡, 교향시 또는 성격작품들이 새롭게 나타났으며, 풍부한 시와 피아노의 구조적 발전은 예술가곡을 정착시켰다. 뛰어난 연주기량을 뽐내기 위한 작품들이 나오면서 비르투오조(virtuoso)라는 기교파 연주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창작기법의 주관적,개인적 취향은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세계주의적인 보편적 경향의 음악에서 벗어나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국민주의나 민족주의 음악을 태동시키게 되었다.

 

 

6. 20세기 전반부의 음악

 역사적 배경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대공황, 파업, 인플레이션, 시민전쟁 등 많은 문제에 직면하였다. 베르사유(Versailles)조약(1919), 이후 국민주의가 더욱 팽배하였고 강대국 간의 정치적 대결이 첨예해져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1917)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919년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 파시즘이 확립되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도자로 하여 나치즘이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서 국가와 계급의 통일, 군사력 확장, 정부의 최고우위 등을 목표로 하는 이념들이었다. 한편 파리는 여전히 세계 각처의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였다.

   변화하는 정치 · 경제 · 사회적 상황과 함께 문학을 비롯한 다른 예술들도 상당한 변모를 보여 기괴스럽고 부조리한 다다이즘(dadaism), 무의식을 불가사의하고 환상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초현실주의(surreal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추상주의(abstractism) 등 새로운 사조들이 등장하였다. 음악에서는 조성, 리듬, 형식을 규정하는 기존의 전통적 원칙을 거부하고 음악의 고유영역을무너뜨리는 급진적 실험을 골자로 하는 '신음악'이 존재했다. 19세기에 이어 민속음악이나 애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민족주의 경향이 계속 존재하는가 하면 신고전주의가 나타나 현대 속에서 전통을 추구하였고,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제2 빈악파(Second Viennese School)에 속하는 작곡가들이 12음계의 음악을 개척하였으며, 스트라빈스키 같은 작곡가는 어떠한 경향에도 국한되지 않고 현대와 전통을 오가는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 시대의 음악은 여러 종류의 새로운 경향과 새로운 기법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음향으로 이루어진 실험주의 음악이 있는가 하면, 과거 전통적인 음악을 고집하여 르네상스, 바로크 등 20세기 이전의 고전적인 기법을 계속 추구한 음악도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변화는 여러 종류의 주의(ism)나 성향(alities)을 끊임없이 만들어 격동의 시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19세기 후반부에서 시작된 민족주의 경향은 20세기에 이르러 보다 많은 국가와 민족들의 음악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찰스 아이브스(Chales Ives)는 미국의 민요, 춤곡, 행진곡, 대중음악, 심지어는 찬송가를 그의 작품의 민족적 소재로 이용하고 있고,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는 그의 발레곡 <로데오(Rodeo)>와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에서 카우보이의 노래를 담고 있다. 영국의 본 윌리암스와 헝가리의 바르토크(Bartók), 코다이(Kodály)와 같은 작곡가는 민속선율을 수집해서 그것의 리듬유형과 음악적 요소를 연구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는 그들이 발견한 모든 음악 요소들을 조합하여 작품을 썼다. 이러한 창작 기법은 바르토크의 <무용 모음곡>,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과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에 잘 나타나 있다.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 민족주의자이다. 그의 15개의 교향곡 중에서 몇 작품은 소련 역사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제7번 <레닌그라드>, 제11번 <1905년>, 제12번 <1917년>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작품들 이외에도 그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의 역사와 국가적인 색채가 짙은 민족주의 음악은 서양 뿐만아니라 동양에서도 꾸준히 나타났다. 때로는 동 · 서양의 민족주의 성향이 윱합되거나 다른 민족의 민속양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바르토크의 민속음악에 기초한 <소나티나>와 <루마니아의 민속춤>, 코다이의 <갈란타(Galanta)춤>, 그리고 윌리암스의 <다이브스(Dives)>와 <라자루스(Lazarus)>의 5개의 변주> 이외에도 20세기의 많은 음악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20세기의 급변하는 양식의 변화는 모든 작곡가들에게 전부 수용된 것은 아니다. 신고전주의는 객관성과 형식성을 보이는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 관념으로 복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18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떤 작곡가들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정통 고전시대의 음악에서 고무받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작곡가들은 르네상스나 바로크의 여러 양식에 눈을 돌려 몬테베르디나 헨델의 음악양식을 모델로 삼기도 한다.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는 그의 작품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의 주제에 의한 환타지아>와 에서처럼 르네상스의 튜더(tudor) 교회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창작적 영감을 얻었다. 티펫(Tippett)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마드리갈에서 리듬구조와 모방 대위법을 인용하였다.

   신고전주의는 기본적으로는 19세기 낭만주의 이전의 예기치 않는 전조, 선율의 혼합 그리고 강렬한 화성, 불협화음 등의 20세기 성향을 갖고 있다. 신고전양식의 전형적인 작품으로는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의 <풀치넬라(Pulcinella)>와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협주곡>, <시편 교향곡>, 힌데미트(Hindemith)>의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4개의 협주곡(op.36)>과 <금관악기와 현악기를 위한 연주회용 음악>, 프랑크(Frank)의 발레곡 <암사슴(Les Biches)>과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전원 협주곡(Concert Cahmpétre)>, 프로코피예프(Prokofief)의 오페라 <3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 피아노 협주곡, 소나타 그리고 <고전 교향곡> 등이 있다.

 

   제2의 빈 악파라고 불리우는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은 12음음악(dodecaphony)이라는 새로운 음악양식을 창안하였다. 12음음악, 혹은 음열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이 양식은 기존의 장 · 단조 음계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음악기법으로 작곡을 하는 것이다. 작곡가는 12개의 음으로 구성된 반음계를 자신이 원하는 순서대로 배열하고 이것을 음열로 하여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데 음열은 한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음을 모두 사용하나 으뜸음이나 조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배열한다. 작품의 선율, 화성, 주제들은 이 음열을 바탕으로 하여 모습을 바꾸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음열은 기본음열(original) 이외에 기본음열을 뒤어서부터 시작하는 역행형(retrograde), 음정관계를 반대로 진행시키는 전위형(inversion), 그리고 전위형을 뒤에서부터 시작하는 전위역행형(retrograde inversion)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작곡가는 주제를 만들기 위하여 이러한 음열을 수평적으로 사용하여 대위법적 구성이 되게 하거나 수직적으로 사용하여 화성적 구성이 되기도 한다. 물론 작곡가는 이러한 음악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창의력을 동원해야 한다. 쇤베르크의 제자인 베르크와 베베른도 음열주의를 택했지만 방식은 다소 다르다. 베르크는 음열의 음을 순서에 맞지 않게사용하거나 음열 밖의 다른 음악 자료를 사용하는 등 훨씬 자유롭다. 음열의 음들을 장 · 단조 조성으로 알아듣기 쉽게 배열하기도 하였다. 소아마비로 죽은 어린 소녀를 추모하는 <레퀴엠>으로 작곡한 그의 애수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베르크는 4개의 온음으로 시작되는 바흐의 코랄 <그것으로 족하나이다.(Es ist genug)>를 사용했다. 이처럼 베르크는 12음기법의 무조음악과 전통적인 음악을 조합하고 있다. 베베른은 베르크보다 훨씬 더 전위적이며 음열의 사용에서도 더욱 엄격하다. 대부분의 작품은 6분 미만의 짧은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음악 구성은 치밀하고 정교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실내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op.21>과 <클라리넷, 테너색소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4중주 op.22>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op.27>등이 알려져 있다.

 

 

* 출처 - http://www.musicschool.pe.kr/

'[취미생활] > Clas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초 성악 발성법 모음   (0) 2009.04.27
미사곡의 이해  (0) 2009.04.27
샤콘느와 파르티타에 대해   (0) 2009.04.27
클래식 작품번호를 만든 사람들   (0) 2009.04.27
우리음악, 그 맛과 소리깔  (0) 200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