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수석

수석과 더불어 반평생을 지내다~~

凡石 2010. 1. 5. 11:14

 

수석취미를 갖은지가 어언 27년이다.

그러니까 1982년에 안양 비산동에 살때다. 아내가 이웃 할머니댁에 우연히 놀러 갔는데, 그 집에는 돌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특히 수석장에 가지런히 진열된 수석들을 보고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었더니, 그 집 할아버지께서 젊은 새댁이 수석을 좋아하는 것이 별나다고 하면서 수석 세 점을 그냥 주셨다고 한다.   

 

 집에 가지고 온 수석을 처음 보는 순간 나도 신기하게만 느꼈다. 어떻게 돌이 이렇게 새까맣고 반질거리면서 골이 푹 파였는지 ....  내가 수석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때 부터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할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고상한 취미를 갖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다시 한번 그 할아버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 지금 세태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느 누가 남이 돌을 좋아 한다고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돌을 선뜻 그냥 주겠는가 말이다.  

 

 물론 지금 시대에도 그런 분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다고 본다. 그 당시 얻어 온 돌은 남한강 돌인데 두 점은 오석이고 한점은 황옥석이다. 크기도 적당하고 석질도 매우 좋다.   지금도 그돌을 보면 그 할아버지의 선행이 떠오르게 된다. 나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 할아버지의 선행을 교훈 삼아 남을 위해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여 본다.   

 

 나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석취미에 대해 잠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탐석(探石)도 많이 다녔고 수석전시회도 빠짐없이 다녔다. 심지어는 지방 전시회까지 불원천리 멀다않고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근년에 접어들어 강이나 바닷가에 나가도 볼 만한 돌이 없어 탐석활동이 뜸해졌을뿐, 돌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본다.

 

 요즈음은 주로 인터넷의 수석사이트를 통해 개인 소장품을 감상도 하고 수석전시회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수석사이트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동안 모아 놓은 석보와 수석잡지들을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지나간 책을 보고 있노라면 수석취미에 대한 인식과 패러다임이 과거와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4년경에 발간된 책만 해도 거의 강 돌이 주를 이루었으나 그 이후부터 바닷돌(해석)이 점증하기 시작하면서 최근호에 이르러는 완전히 바닷돌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해석(海石)의 형태나 문양도 변화가 있었다. 초기에는 해석의 산지(産地)나 크기와 문양도 다양하지가 않았다.  대체적으로 큰 돌들이 선보이면서 문양의 의미도 그렇게 섬세하지가 않았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산지도 다양할뿐더러 아주 작은 돌이라도 문양만 선명하게 갖춰지면 좋은 돌로 평가 받는 것 같다. 이러한 추세는 아마도 바닷가 산지에 수석이 고갈되어 표준 크기의 규격석이 잘 나오지 않는 현실로 받아 드려야 할 것이다. 아무튼 강돌이든 해석이든 또는  작든 크든 간에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인이 즐겁고 낭만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외국돌이 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97년 경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 발간된 월간수석을 보면 강 돌 위주로 간간히 게재 되다가 2000년 이후부터 해석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게재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외국 돌은 어딘지 모르게 정감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몸 속 깊이 배어 있는 신토불이 정신에서 오는 일종의 고정관념때문이라고 본다. 

 

 요즈음 시간이 나면 수석방에 들어 앉아  돌들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석장(石欌)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어떤 놈은 일광, 어떤놈은 삼척, 어떤놈은 남한강, 어떤놈은 임진강, 어떤놈은 보령, 어떤놈은 점촌 등등 ... 모두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돌들을 보고 있노라면 편안해 지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하나 하나마다 내집에 들어 오기까지는 구구한 사연도 많다.  대다수의 돌들이 내가 직접 탐석하여 데리고 온 놈들이 많으나, 경우에따라서는 지인으로 부터 받은 선물도 있고, 더러는 구입한 놈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애착이 가는 놈들은 뭐니뭐니해도 내가 직접 탐석한 돌들이다.

 

  한창 탐석을 다니던 시절은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였다고 본다.  1995년까지는 남한강에서 주로 탐석을 많이 하였고 그 밖에는 가끔 바다나 계곡 등을 찾아 다니며 탐석을 하였다. 남한강 탐석 시절에는 충주 조정지댐과 목계, 도리, 천서리, 삼합리 등에서 자갈채취작업이 한창일 때다. 

 

 당시 탐석 환경도 강가의 건천(乾川)보다는 자갈채취장에서 볼 만한 놈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작업채취장 주변에는 항상 탐석꾼들로 붐비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모래와 자갈을 실은 덤프트럭이 야적장에 도착하게 되면 탐석꾼들은 이때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트럭의 적재함에서 수석감으로 보이는 돌이 우르르 쏟아 지면, 무조건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하면서 긴 갈쿠리로 돌을 찍어, 내 앞으로 거둬 드리는 쟁탈전이 벌어진다. 때로는 혈안이 되어 네돌이니 내돌이니 하면서 서로 싸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환경에서 아귀다툼까지 하면서 돌을 차지 한다는 것은 고상한 취미를 가졌다는 수석인 입장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수석인들의  <一生一石>의 꿈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누구나 명석(名石)을 갖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추억 담이지만 당시의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 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당시 매주 일요일만 되면 아내와 함께 새벽 5시에 일어나 남한강 탐석을 위해 집을 나선다. 93.1 FM에서 흘러 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산지에 도착하면 동이 트기 시작한다. 탐석 전에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어떤 때는 여주 시내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어떤 때는 양평 해장국집에서, 어떤 때는 요기로 집에서 샌드위치와 과일을 준비 한다. 이른 새벽  안개가 자욱한 남한강변에 도착하면 시골 농가 굴뚝에서는 아침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농가 뒤란 나뭇가지에 참새들은 이제서야 잠에서 깨어났는지 저마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아침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당시만 해도 덕소와 양평 간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요일 날 늦게 올라 오게 되면 차가 막히어 고생을 한다. 따라서 오전까지만 탐석을 하고 일찍 귀가를 서두른다. 집에 와서 오늘 탐석한 돌들을 하나 하나 물로 씻으면서 수석으로서의 가치를 감별 한다. 어떤 놈은 앞으로 양석(養石)을 시키면 물건이 될 수있는 것도 있고, 어떤 놈은 아예 수석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도 있다. 이런 놈들은 나중에 모았다가 다시 그들의 고향인 강으로 보낸다.  

 

 남한강에서 탐석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건천에는 수석감이 고갈된 지가 꽤 오래 되었고, 그나마 탐석장으로 유지되던 자갈채취 작업도 남한강의 모든 곳에서 다  이루어져, 더 이상 작업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석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이후부터 바닷가의 해석(海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나는 원래부터 강돌만 고집하다 보니 남들이 선호하는 해석은 갖고 있는 것도 별로 없을뿐더러 지식도 무지하다고 본다. 지금까지도 강돌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가끔  해석을 접하기도 하는데, 때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 밖에 탐석하면서 겪었던 일화들도 많다. 동해안 어느 바닷가에서 돌을 주으려고 바다에 들어 갔다가 파도에 휩 쓸려 옷이 전부 젖었던 때도 있었고, 뜨거운 여름날 한탄강변을 거닐다 구멍(透) 뚫린 돌을 건져 올리고 희열을 느껴 보던 시절도 있었고. 제주도 어느 모텔 앞에 정원석으로 뒹굴던 화산석 한점을 배낭에 넣고 공항 출국장을 빠져 나오려다 검색을 당하던 때도 있었다.  그밖에 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이제 이 모든 것들을 추억으로 영원히 고히 간직하고 싶을뿐이다.

 

 석장에 명석은 없지만 그래도 시원스레 뻗어 내리는 폭포석, 북극곰을 닮은 물형석, 남자 여자의 거시기를 닮은  음양석,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닮은 인물석, 금강산을 그려놓은 문양석,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외로운 섬의 문양석 등이 보인다. 한편 베란다의 수반 진열대에는 자연 경치를 닮은 산수경석과 휘엉청 밝은 보름달도 보인다. 물을 뿌려 보는 순간, 돌에 생명이라도 있는 듯 윤기가 산뜻하게 살아난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생기가 돋는다. 

 

 나는 이 시간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지금까지의 반평생을 돌과 같이 살았고 나머지 인생도 돌과 같이 살고자 한다.  

 

 

 

 베란다에 있는 수반진열대의 수석들이다. 남한강, 임진강, 덕산, 동강, 무주호피석들이 눈에 띤다.

 

 

 

 베란다 수돗가에서 양석중인 돌들이다.  

 

 

 

  거실 한편에 있는 돌들이다. 대나무 문양도 보이고 단석도 보인다.

 

 

 

역시 거실 한편에 있는 화문석이다. 넝쿨 장미와 소국의 문양으로 보고 있다.

 

 정선에서 나온 연마석인데 산경의 험준하게 보인다.

 

  복두꺼비 형상석이다. 우리 집의 수호신으로 통한다. 점촌돌인데 피질이 유리알이다.

 

 

 

 

 

 

 

 

  

 

 

 석장안의 수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