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수석

수석을 이해하는 논리(1)

凡石 2009. 4. 25. 22:40

수석을 이해하는 논리(1)

이글은 상주수석회 창립 30주년 기념 석보 천석2에 실린 현 상주여고 박용기 교장선생님의

글을 올린것입니다.

 

1.수석의 정의

 수석이란 감상을 위하여 선택된 자연석이다.

자연석이라 함은 물리적인 자태로서 규정된 돌을 의미하며, 선택되었다는 의미는 인간의 가치 위식은 돌이란 대상에 내재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수석의 정의는

 1) 어떠한 자연석이어야 하는가?

 2) 선택된 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두 가지 명제에 답하는 것이다.

 

  먼저 자연석이라는 의미로 수석을 규정해보면 이는 오랜동안 자연의 풍상을 겪은, 소위 시간성을 지닌돌이다. 시간적으로 오래되지 않은 생돌이나 인공이 가미된 돌은 자연 특유의 절대적 미를 지니지 않으므로 수석으로서 존재가치가 없다.

 수석의 '수(壽)'는 인생살이의 수로서 오랜세월에 걸쳐 돌 스스로의 삶을 겪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 공간적으로 보아 수석이 되는 자연석은 손으로 자유롭게 운반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라야 된다. 손으로운반 할 수 없는 바위나 정원석은 수석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한편 돌이 선택된다 함은 돌이라는 객관적 대상에 우리의 주관적 의식을 투사하여 특별한 미적 감흠을 얻어낸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감흥을 얻을 수 있는 공감적 요소는 돌이 예술가의 조각처럼 균형이 잡혀있거나, 색재가 특이한 무늬가 있고, 또 모양이 기이하여 감각적으로 즐거운 자극을 느낀다는 점 한 가지와, 중량감 있고 정적인 돌에 예술가적 혼이나 율동을 불어넣는 - 다시 말해 돌에 생명감(生命感)을 표현해 보는 -  즐거움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예컨대, 무관심하게 널려있는  강변의 돌 한 점에 가령 독수리 무늬가 있거나 또는 그것의 형태가 독수리의 형상으로 간주되면 우리는 그 돌을 연출하여 공중에 비상해 있는 독수리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또 초가형의 돌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숨겨진 특이한 돌들을 선택하여 의미를 부여해 보는 행위는 훌륭한 자아실현이라 할 수 있다.

 

2. 수석의 근본적인 물음

 그러면 "나는 수석인 이요"라는 말을 하기위해 우리는 어떤 원리를 터득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순진하게도 수석이라 부르는 볓개의 돌을 소장하고 있고, 또 산돌과 강돌 또는 바다돌 정도는 판별하며, 특별히 오석(烏石)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확실히  "나는 수석인이요" 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취미로서의 수석은 누구나 입문할 수 있는 매우 민주적인 면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수석이라는 취미생활을 제대로 한다면 수석의 물리적 자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석인이라면 상식적인 수준에서라도 수석이 무엇인지, 왜 수석을 좋아하는지, 좋은 수석이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떤것의 근본적인 물음은 그것의 내면세계를 말해야하므로 답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들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기본적 물음이 수석의 참가치를 판별케하고 수석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때문이다.  가령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을 하는 경우  "종족보존을 위해서" 혹은  "기왕 태어났으니까"  라고 답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생의 분명한 목적을 어렵사리 진술해야 할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행위의 근본적인 물음을 답변한다는 것은 그 행위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는 방향을 바로잡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석인들이 진정 수석이라는 돌을 아끼고. 또 그것에 심취하여 수석문화까지 운운해야 한다면, 수석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우리는 수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3. 수석을 좋아하는 이유

 수석을 하는 이유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돌은 감각적으로 호감을 준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실 뻔한 대답 같지만 다른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다. 즉  "꽃을 왜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 예쁘고, 향기가 있으니까" 라고 대답한다. 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왜 먹니?" 라고 물으면 그 답도 뻔하다.

 영국의 유명한 등산가 조지 말로리는 어느 모임에서 강의를 하고 나가던 중 졸다가 꺠어난 한 아줌마의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 그 아줌마의 질문은  "왜 산에 가십니까?" 라는 것이다. 얼떨결에 말로리 경은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로  " 아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가지요"라고 답을 했다. 사실 이 말은 후에 등산가들에게 불멸의 경구가 되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감각적으로 산이 좋다는 말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느껴서 하는 말은 그로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 사고 후에 하는 다양한 답과 차이가 있다. 다만 이성적인 답변은 감각적으로 왜 그렇게 되는지를 잘 알리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어떤 이유로 돌을 사랑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여 이성적 사고를 유도하는 답변을 요구해  볼 수 있다. 이 경우도 "돌이 거기에 있으니까"  "돌이 내 마음에 드니까", 또는 "보면 몰라요" 라는 감각적인 답을 하면  난처하다.

필자는 돌을 좋아하는 이유를  두 가지 면면으로 요약해 보고 싶다.

 첫째는 방금 언급한대로 돌이 주는 직접적인 쾌감 때문에 돌을 좋아한다. 이런 쾌감은 누구나 가지는 아름다움 추구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의 돌을 노려보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가지 생각 또는 욕망이 돌이 이모저모와 딱 들어 맞을때 아! 하고 느끼는  즐거움이다. 좀 유식하게 말하면 나의 주관과 돌이란 실제 즉 객관이 일치되는 순간의 만족 때문에 돌을 좋아하고, 또 그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명석(名石)이란 돌에서 느끼는 쾌감의 정도가 오래가는 돌이라 할수 있다. 수석이란 그런 의미에서 미적 쾌감이라는 기본적인 테두리를 그어 놓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하고 많은 취미 중 왜 돌이란 대상에 쾌감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돌을 좋아하는 다른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수석이란 돌을 쾌감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쎄요, 즐거움을 구하는 이유는 본능적 욕망 때문이고 돌이란 대상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몇 가지 색조를 선택한다든가 음식점에서 우리가 음식을 시켜 먹을 때 몇 가지를 선택하는 이치와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우리가 수석을 선택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까닭은 수석이 우리에게 안정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까닭 없이 막연히 일어나는 마음의 분열상태가 조금씩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그런 상태를 공포와는 달리 불안이라 지칭하면, 사람은 누구든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을 제거하고 잊어버리게 하는 안정추구의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정추구의 좋은 대상중의 하나가 수석인 것이다. 우리는 늘 심각한 변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세상에 그저 내던져져 있으며, 불의 변화처럼 활활 타오르듯 혹은 꺼져 갈듯한 사회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그와 같은 萬物流動에 의한 변화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고 무엇인가 고정되고 안정되고 안정된 것을 추구한다고 불 수 있다. 그러므로 수석인은 이러한 고정 또는 안정의 추구를 위해 자연물 중 변화가 가장 더딘 돌을 선택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일상의 번거로움을 잊어보는 것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가장 강도 높은 다이아몬드를 찾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안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動的이라든가 靜的이라든가 하는 말로서 사물을 이원 분류해 볼 때 돌이란 자연물은 정적 대상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적 대상이 우리의 안정  추구라는 정신적 율동과 자연스럽게 합치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그런 의미에서 수석은 돌이란 정적 자연물에서 관념상의 동적 변화 즉 정신적 율동이 작용하여 쾌감을 얻는 취미생활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산수 경석이란 돌 속에서 멋진 봉우리를 상상하고 또 폭포나 호수를 생각하는 것도 일상의 근심이나 불안을 잊어버리게 하는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안정추구의 욕구는 수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많은 취미에도 개인의 속성대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수석과는 대조적인 盆栽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것의 의미는 동적인 변화를 가지는 나무에서 정적인 안정을 구해본다고 할 수 있다. 즉 분재는 수석과 달리 안정추구의 욕구충족을 위해 크면서 변화하는 나무를 자기 사고의 틀에 맞는 형태로 고정시키는 취미활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필자의 경우 분재는 죽인다는 불안 때문에, 또 도자기 같은 취미는 깨어진다는 불안 때문에 선택하지 않으나 이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수석이라 부르는 돌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돌이란 대상이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고, 안정 또는 고정이란 속성을 가지고 있어 유리의 미적욕구와 안정적 욕구를 동시에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