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수석

수석을 이해하는 논리(2)

凡石 2009. 4. 25. 22:38

수석을 이해하는 논리(2)

 

4. 좋은 돌의 의미

 이제 어떤 돌을 좋아하는가? 라는 물음을 해보자. 이 물음은 솔직히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표현이 다 그러하듯 共感的 사항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돌의 선택원리는 돌을 선택하는 사람의 가치 기준이 각각 다르며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좋은 돌에 대한 공감적 가치기준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 질까? 그것은 아무래도 다수의 권위에 유도된 선택기준을 책이라든가 동료로부터 습득하고 거기에다 개인의 특성이 보태어져 형성된다고 본다.하지만 공감적 돌의 선택기준은 다수의 권위를 지나치게 수용한다면 문제가 된다. 예컨대 몇몇 돌장수의 스타일을 따르는 단정적인 금전유도형 판단이라든가, 또는 거금을 투자하여 많은 수석을 창고에 쌓아놓은 사이비 대가들의 금전집착형 의견을 따르기만 하는 것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여 수석을 보는 시각을 잘못 유도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에 관한 한 우열인(愚劣人)의 다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고 개인이 자기의 주관에만 집착하면 다수의 공감적 견해에 소외되기 쉽다. 따라서 돌을 선별하는 경우 금전유도형의 기술자적 감상안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상당한 학식과 예술적 경험을 갖춘 선인들이 탁월한 감상능력을 바탕으로 한 체계적 이론을 먼저 학습하는 것이 좋으면, 그리고 나서 개개인의 감상안목(感賞眼目)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가. 중국과 일본의 수석이론 비판

 우리 수석계에 이것 밖에 없다 할 돌의 선별기준이 있었다면, 하나는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형(形), 질(質), 색(色)이라는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화공 미원장(1051~1107)으로부터 나온 네가지 돌의 관상(觀賞) 기준으로서, 빼어남의 수(秀), 야윔의 수(搜). 구멍 둘림의 투(透), 주름잡힘의 준(竣)이라는 기준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돌에서 쾌, 불쾌의 감정을 가늠한다는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우리의 자연석 판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나라의 기준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 기준들은 우리에게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돌의 특징이 우리의 돌과 모두 같을 수 없고, 또 그러한 돌의 선별기준을 형성환 사회 문화적 환경과 사고는 서로 다를 것이며, 무엇보다 그런 원리가 논리적 사고도 없이 예술인 특유의 즉흥적 사고에 의해 지어낸 주먹구구식 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수(秀), 수(搜), 투(透), 준(竣)이라는 관상기준에서 수(秀)의 의미는 다른 세가지 기준에 비해 구체적이지 못하고 막연하다. 그것이" 빼어나다 " 의 뜻을 지닌다면 돌의 무엇이 어떻게 빼어난 지를 구체화 할 수가 없다. 수(搜)는 돌이 야위고 날씬하며, 투(透)는 구멍이 있어 다른 세계를 보는 느낌이고, 준(竣)은 주름이 잡혀 변화가 있다는 등 구체적이지만, 수(秀)의 의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의 질문만큼 딱딱하다. 아마 搜, 透,竣의 세가지 구체적 조건이 秀의 충족기준으로 명시된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形, 質, 色이란 수석이론도 허점이 있다. 이 선별기준을 보면 質과 色이라는 수석의 기초개념에 形이라는 한 차원 높은 개념을 동일한 개념으로 나열 하였으니 논리적으로 적절치 않다. 그런식 나열은 자장면, 우동 옆에 국수나 라면이 아닌 송편을 나열한 것과 같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質과 色은 선별의 중요한 기초사항이긴 해도 크기나 중량과 더불어 수석과 비수석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구분하는 요소에 불과하고, 形이란 감상의 차원에서 돌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예술적 요소인 것이다. 수석의 선택기준은 형태의 기준을 말한다. 사실 形, 質, 色의 세가지 항목을 동등한 조건으로 나열한다면 돌의 선별기준은 그것만으로 부족하고, 돌의 크기, 중량 같은 항목도 같이 나열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돌밭에서 "돌을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을 받는 경우 그가 수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면 돌의 크기, 중량, 質,色 등 수석과 비수석의 구분을 먼저 해 줄 것이며, 수석과 비수석의 기본적 구분이 되는 사람이면 돌의 형태에 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초보자가 "어떤 돌을 선택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검고 단단하고 모양 좋은 돌을 선택하라."고 했다면 그는 다시 좋은 모양의 돌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다시 물을 것이다. 결국 돌의 실질적 가치기준을 形의 문제가 가장 우선이 된다고 할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일본식 돌 이론을 둥근 모암(母岩)만을 기본으로하는 해석(海石)의 등장으로 形質의 문제가 퇴색되기도 한다. 물론 해석을 좋아하는 수석인들은 해석의 모암(母岩)이 원형이라야 된다는 바로 그런 일변도의 사고 때문에 점차 형태의 문제는 없어질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도 모암이 원형이 되어야 한다는 해석의 이론은 조만 간에 변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 한국의 수석 이론

 그렇다면 한국의 수석이론은 어떤것일까?

 일반적으로 돌에 대한 즐거움을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돌을 보는 순간의 느낌이나 사고에 따라 -시원하다, 짜릿하다, 뭉클하다는- 세가지 감상으로 분류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돌에 있어 평(平)의시원함, 각(角) 짜릿함, 곡(曲)의 뭉클함이라는 감상의 포인트를 말하는데, 대체로 한국의 돌 이론은 이 세가지의 감상 기준을 감안하여 합리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한국 수석의 삼요소는 1)균형(均衡), 2)변화(變化), 3)상상력(想像力)이다.

 먼저 균형잡힌 돌이란 돌의 모양이든 무늬든 수직과  수평의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안정감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돌이 자기 쪽으로 튀어나와 공격적이며 고개를 돌리고 있거나 그저 완급이 치우치기만 하고 시각적으로 자연스런 모양이 회복이 되지 않은 형태의 돌은 선택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변화 있는 돌이 좋은 수석이 된다.

변화는 항상 우리의 근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돌이 시원스런 느낌의 변화를 이루고 있거나, 가슴을 휘젓는 듯한 힘찬 변화, 또는 칼로 째는 듯한 짜릿한 변화를 이루면 그 돌은 다른 돌에 비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만족도가 높으며 그렇지 않은 돌에 비해 선택되는 이유가 훨씬 높다.

 마지막으로 좋은 수석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돌이다. 돌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없거나 상상의 요소가 풍부하지 않은 돌은 싫증이 빨리 난다. 초보자들이 명품 수석을 보고도 "이게뭔데, 그냥  돌 아닌가?"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돌에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석인들이 풍경석을 좋아하거나 요즘의 해석처럼 돌 속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도 돌에서 상상력을 풍부하게 동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수석이란 균형(均衡)이 잡히고 변화(變化)가 있으며, 상상력(想像力)을 동원할 수 있는 선택된 자연석으로서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크기의 돌이라 할수 있다.

 

5. 수석인의 예절

 나는 생각하고 수석은 침묵한다 해도 나와 돌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수석의 의미는 없어진다. 한마디로 수석이란 인간의 사랑을 받아 선택되는 자연석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석의 즐거움은 인간의 마음과 돌이란 자연물이 합쳐져서 오는 질 높은 쾌감이다. 하지만 이때 나의 욕망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되면 돌의 판단은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쾌감의 질은 저속해 진다. 즉 우리의 욕망과 돌이란 자연물이 서로 균형을 알지 못하면 명석의 의미는 誤導되며 나아가서 돌의 본질까지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돌을 판단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꿈 깨라는 비판을 받았다면 누구든 자기의 주관적 의식 즉 욕망이 지나치거나 아니면 부족한 것이 아닌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예컨대  "나는 돌을 많이 소장했고 또 돌을 오래했으니 내가 내린 돌의 판단은 틀림없소."라고 한다면 그건 "옆에 있는 사람아 나의 판단에 따르시오"라는 일종의 명령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또 옆에 서는 "제까짓게 뭘 안다고"라는 빈정거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한 빈정거림이 심해지면 돌의 판단은 없어지고 사람에 대한 비판만 남게된다. 수석은 처음부터 인간에 의해 선택된 자연석을 대상으로 하므로 돌과 인간이 합일 하지 않으면, 수석의 개념과 예절은 없어진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수석도 일상의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공감적 의식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자연물 즉 돌과 인가느이 관계맺음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 맺음에는 당연히 우호적 의미의 질서가 요구된다. 돌을 오래했다는 것만으로 또 비싼 돌을 많이 소장했다는 것만으로 돌의 판단을 함부로 내린다면 돌과 인간의 관계맺음이 전적으로 우호적인 것이아니다. 가령 "이 돌은 무슨 연랍회 회장이 좋다고 했으니까 좋은 거야"라고  할 수는 없다.그렇다고 돌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 돌은 분명히 이러저러하오."라고  안목 없이 고집스런 판단을 한다면 그런 것도 일종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뚜렷한 주관 없이 돌이란 실재에만 지나치게 집착을 해도 상상속의 선명한 그림처럼 기막힌 돌을 찾지 못하고 또 욕망이 지나쳐도 판단이 흐려져서 만족스런 돌을 찾지 못한다.

주관과 객관의 적절한 조화가 돌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만 돌이 바로 알려진다 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수석인들이 돌에 대한 미적쾌감을 높이고 아찔한 느낌의 황홀경에 도달하기 위해선 교양은 물론 자기류의 개성도 있어야 하고,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의 돌도 많이 경험하여 욕망과 실재의 불균형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지나침과 모자람의 불균형 상태를 벗어나야 나와 돌과의 일을 이루며, 돌에 대한 조화, 균형, 또는 중요이라는 최적의 관조(觀照) 상태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수석도 하나의 동양적 道의 구현과 흡사하다 하겠다. 다시말해 수석의 길은 돌이란 실재에 우리의 마음을 담은 求道의 길인 것이다. 물론 道의 경지는 수석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르고 또올라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도의 경지가 높다 해도 그러한 경지는 우리의 곁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여 돌의 싶은 경지를 추구하는 구도자로서 수석인은 바도 우리 주변에 존재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돌에 대한 구도자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도는 잠시 마음먹는다고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도의 원리대로 돌을 볼 때 주관에 얽매이지 말고 객관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무엇이요 라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수석에 있어 구도의 경지로 가는 것은 돌과 나와의 자연스런 합치라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돌과이 자연스런 합일은 번쩍이는 영감과 더불어 오랜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禪家의 道를 수석에 잠깐 도용해 보면

"당신이 수석을 공부하기 전에는 돌은 돌이다."

"당신이 수석을 공부하는 동안은 돌은 그냥 돌이 아니고 돌 이상의 무엇이다."

결국 수석의 도는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돌과 나와의 합리적 관계를 추구하는 하나의 예절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나 하나의 돌에 어떻게 하면 개성있고 타당성 있는 의미를 부여할까 하는 유의미성의 설정과 판단하기도 한다. 수석의 도를 떠난 무의미한 돌들이 함부로 다루어질 때 우리의 자연은 훼손되고, 수석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조석을 만들며 수석의 의미를 금전위주로 오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석인의 도의 경지는 돌을 통해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재현하려는 작은 노력이며, 이는 돌에 대한 욕망의 과부족 상태를 벗어난 돌과의 예절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며, 또 돌에 대한 쾌감의 질을 높이는 교양이요, 나아가서 높은 수석문화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글은 고향인 상주의 수석인들을 위하여 필자(전 달구벌 수석회 총무)가 발표한 다음의 글에서 발췌

편집한 것임을 밝힙니다.

 1. 바른돌 상식 (월간수석, 1986년 1월호)

 2. 수석이란 무엇인가?(월간수석, 1987년10월호)

 3. 수석감상의 방법과 자세(수석문화,1991년 1월호)

 4. 수석의 내면세계와 예술성(수석문화,199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