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모짜르트 제대로 알기

凡石 2009. 4. 27. 20:57

모짜르트 제대로 알기(위키 백과사전에서 퍼왔습니다)

요즘도 모짜르트를 살리에리가 죽였다고 믿는 분이 계셔서 이렇게 퍼왔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서양 고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곡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이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대주교 관할 구역이었던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루퍼트 성당에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라는 세레명을 받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모차르트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교육자 중 한 사람으로,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

레오폴트는 어린 볼프강을 데리고 연주를 다녔다. 볼프강은 눈을 가리거나 손을 뒤로 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그가 본 적이 없었던 어려운 악절을 갖고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볼프강에게 병이 난 적이 있었는데, 레오폴트는 아들의 몸보다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더 걱정했다.

모차르트는 1762년 뮌헨을 시작으로 3년 반 동안 아버지를 따라 비엔나, 다시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헤이그, 다시 파리, 취리히, 잘츠부르크, Donaueschingen, 뮌헨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모차르트 일행은 1767년 말에 비엔나로 가서 1768년 12월까지 거기에서 지냈다. 잘츠부르크에서 1년 동안 지낸 다음 이탈리아로, 1769년 12월에서 1771년 3월까지, 1771년 8월에서 12월까지, 1772년 10월에서 1773년 3월까지, 세 차례 갔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를 한 번 듣고 기억만으로 전부 써내려갔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로 갔는데,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서 1764-5년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엔나

1781년 모차르트는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작곡가로 들어가면서 비엔나로 옮겼는데, 얼마 못 가 쫓겨났다.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둘은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네 명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두 명의 아이 카를 토마스(Karl Thomas, 1784-1858)와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Franz Xaver Wolfgang, 1791-1844) 모두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다.

1782년은 모차르트에게 행운의 해인데, 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이 쓴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지휘·협연하기 시작했다.

1782년부터 1783년까지 모차르트는 바로크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영향으로 바흐헨델과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뒷날 마술 피리교향곡 제41번에 등장하는 푸가 처럼 바로크의 형식을 띈 작품을 쓰게 된다.

비엔나에 살던 중에 모차르트는 요제프 하이든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이 비엔나에 올 때면 같이 현악 사중주를 즉흥 연주하곤 했던 것이다.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작곡된 모차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중 여섯 개가 하이든에게 헌정된 것이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경외롭게 보았는데, 처음 모차르트의 작품을 듣고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신 앞에 맹세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내가 들어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그에게는 감각이 있고, 게다가 그는 가장 뛰어난 음악적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 피리의 주제는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내내 가난과 병에 시달렸다. 종종 돈을 못 받기도 했으며, 돈을 낭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받은 돈도 모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와 《돈 조반니》를 썼던 비엔나의 집은 현재 보전되어 있다.

죽음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쇄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수은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게 맡겼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위촉을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그가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써버린 것이었다는 증거 또한 있다. 그는 알려진 것처럼 공동 묘지에 묻히지 않고, 1783년 법령에 따라 공립 묘지에 묻혔다. 다만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809년 콘스탄체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추종자로서 그의 편지를 정리하고 전기를 썼다.

음악

모차르트는 다작을 한 작곡가로,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현악 사중주 등이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그 당시에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모차르트 혼자서 발전시켜서 대중화했다.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 음악과 실내악곡, 그리고 디베르티멘토와 춤곡과 같은 가벼운 곡도 썼다.

영향

모차르트 이후로 많은 작곡가가 모차르트를 경배했다. 조아치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4번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1번에 의한 것이다.

쾨헬번호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전설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데르 푸슈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세르게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모차르트가 다섯 살때부터 작곡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그가 20세 이전에 쓴 작품은 너무 단순하여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가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는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서 나온 것이었다.

 

출처 : 고클  강보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