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바이올린 협주곡

凡石 2009. 4. 27. 21:55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바이올린 협주곡

 

 

김지하 시인은 그의 유명한 격문에서 폭압적인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풍자 또는 자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오적”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풍자냐 자살이냐”는 글귀는 늘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외국물을 많이 먹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소비에트의 비젼에 찬동하여 자발적으로 소비에트로 영구 귀국하는,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패착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일찍이 모짜르트의 재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천재적이고 창의력과 기발함이 번득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레닌의 급작스런 사망 덕에 정권을 잡게된 그루지야 출신의 편집증적인 미치광이 청년인 스탈린은 모잘트에 대한 Hieronymus 추기경의 존재보다 훨씬 해롭고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는 풍자정신이 있었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풍자라는 무기로 견디었고 외부의 해로운 상황이 내면의 정신을 갉아 먹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유연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질적으로 외부의 모든 자극을 내면화(introverted)하는 사람이었고 대단히 심각하고 경직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프로코피예프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었던 배출구- 풍자-가 결여되었습니다. 해로운 외부의 상황을 본인이 전혀 제어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을 때 바로 공황발작(panic attack)이 발생합니다. 자기 방어를 위해 작동하지만 결국은 자기 파괴적일 수 밖에 없는 이 반응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규정하는 stigmata입니다.

그의 곡은 예외 없이 지나치게 고요하고 적막한 불안한 평안함을 주는 느린 악장과 발작적이고 맥락에서 벗어난 듯한 lunatic한 악장으로 구성됩니다. 그의 느린 악장은, 모짤트나 하이든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평화로움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곧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필연적으로 수반한 또는 잉태한 “공포의 예감”입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맞았다는 듯이 바로 다음 악장은 날카로운 비명과 절규가 범벅이 된 빠른 악장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평화로운 느린 악장, 그리고 결국에는 패배가 확실함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그곳을 향해 행진하는 서양의 “비극적 영웅상”을 표현하는 약간은 허장성세가 있는 마지막 악장으로 끝납니다.

공포의 예감 – 공포의 타격 – 공포 후의 잠시 동안의 평화 – 비극적 행진이라는 심리 진행은 그의 곡에서 예외 없이 보이는 정서의 흐름입니다. 간질환자가 간질 발작 후에 잠시 동안 느끼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other-worldly) 평온함을 그의 느린 3악장에서 느낍니다. 그의 곡에서 말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곡 기법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공유한 염세적 비관적 세계관에 기인합니다. 신이 없어진 광막한 우주에서 인간은 신의 아들에서 언젠가는 사그라져 없어질 우주의 먼지로 전락합니다. 이런 구원의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세상에 말러는 울었고 쇼스타코비치는 깊이 절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강한 긍정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적인 인간상인데 이런 절망을 초극한 이가 바로 베토벤이고 최근의 예술가로는 닐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베토벤이 정말로 위대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한” 삶의 절대적 긍정과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에서 드러난 그의 초월적 세계관 때문입니다. “자연은 사람에게 호의도 적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삶의 이유는 있다라는 것으로 요약되는 그의 예술은 Escape from reality but affirmation of the life라는 예술의 모토를 체화한 정수입니다.

그의 비관적 비젼으로 인해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늘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은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쏘련인 보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고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태인이 600만 명이지만 2000만의 쏘련인이 대숙청으로 죽었습니다. 하나 건너 가까운 이웃이 어느 날 소리없이 사라지는, 그 슬픔조차 소리내어 울지 못했던 암울한 시대에 그나마 자살하지 않았던 것이 용기였을 것입니다. 저의 한국계 러시아인 친구는 어느 날 절대로 러시아인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왜냐는 저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희극적이지만 절망적으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착한 러시아인은 스탈린 대숙청 때 끌려가서 다 죽었다고”. 마치 조개가 자기 아픔을 키어 진주를 키워내듯이 시대의 절망을 온 몸으로 껴안아 영롱한 작품을 잉태하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5번 교향곡은 그 내용보다는 주변의 사건이 훨씬 떠들석하게 언급되는 곡입니다. 그의 오페라 “므센동크의 멕베스 부인”은 초연 때 공산당 기관지와 비평가로부터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구현한 훌륭한 작품이라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일변하여 공산당 기관지 “푸라우다”는 이 곡을 서구적이고 지나치게 세련된 부르조아 철학을 구현한 퇴폐적인 곡이라는 비난합니다. 초연이 예정되었던 4번 교향곡은 취소되고 그는 졸지에 생명까지 위태해진 상황에 빠집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5번 교향곡을 발표합니다. “정당한 비판에 대한 예술가의 응답”이라는 부제를 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놀랐는데, 정치적 위기에 빠진 예술가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들어있는 칸타타 류의 곡이 아니라 추상적인, 따라서 또 비판 받을 위험이 있는 교향곡으로 재기를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반응은 좋아서 평론가와 기관지들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잘 구현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건설적이고 낙관적인 비전을 지닌 훌륭한 곡으로 찬양받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꽝스러운 면이 많은데 특히 4악장을 보면 그렇습니다. 당시 평자들은 이 악장을 인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비젼, 확실한 인간승리에의 비젼 등으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건 정말 논센스인데, 첫 째는 작곡가 자신의 언급인데, 그가 죽기 얼마 전 이 악장을 치유될 수 없는 절망(irreparable despair)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둘 째는 직접 들어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상하게 들어도 도저히 희망에 찬 행진곡으로는 들을 수 없으며, 절망의 음울함이 도처에 깔려있는 탈출할 수 없는 절망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곡은 그의 절망의 독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절망의 규모가 크고 절실하여 청자에게 깊은 각성(arousal)과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역시 CD로는 가지고 있지 않아 LP로 듣고 있습니다. Andre Previn이 LSO와 협연한 판(RCA), 그리고 Chicago 필과 협연한 판(EMI), 스베틀라노프의 USSR심포니 지휘(EMI/Melodiya), 케르테츠의 스위스 로망 지휘(Decca), 아들 막심의 USSR심포니 지휘(EMI/Melodiya), 번스타인의 쏘련 현지 New York필 실황(CBS), 베르굴른드의 번마우스 지휘(EMI)가 있습니다. 다 좋게 들립니다. 프레빈의 지휘는 대단히 세련되고 정제된 심리적인 쇼스타코비치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스베틀라노프의 지휘는 선이 굵고 좀 더 primitive합니다. 특히 금관이 너무 달라 아주 야성적이고 psychotic한 음색을 들려줍니다. 다만 4악장이 조금 쳐지는 느낌입니다. 베르굴른드의 지휘는 에너지가 넘칩니다. 연주회가 기대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두 곡 작곡합니다. 둘 다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됩니다. 1번은 1948년에 완성되지만 또 정치적인 이유로 초연은 한참 나중에 이루어 집니다. 1948년 스탈린의 주구인 Andrey Zhadnov는 쇼스타코비치를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반하는 형식주의자(formalist)라고 공개비판하고 쇼스타코비치는 해고됩니다. 해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속물들에게 많이 시달립니다. 최근 BBC music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 막심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들의 dacha 옆에 있는 정부운영 휴양지(Rest house for state workers)에서 대형 스피커로 쏘련 관영방송을 하루 내내 틀어 대어 작곡을 방해했답니다. 위해를 가하려는 자들도 많아 막심이 그 어린 나이에 나무에 올라가서 새총으로 쏘아 막기도 했다고 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 현악사주중단과 오이스트라흐를 특히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례적으로 4악장으로 이루어졌고 곡의 진행은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 고요한 1악장- 날뛰는 스케로쪼 2악장 – 다시 더 고요한(serene) 3악장(까덴자가 길고 독특함) – 활기에 찬 4악장으로 되어있습니다. 1악장과 3악장의 기괴하게 고요하고 슬프기도 한 정서의 표현이 관건인데 긴장감을 최대한 유지해야 하는 테크닉이 관건입니다.

콘드라신과 코간의 연주(EMI/Melodiya, stereo, LP), 오이스트라흐와 므라빈스키의 연주(Melodiya, 10” LP, mono) 그리고 오이스트라흐의 여자 제자(이름이 어려워서 기억이 안남, 몰로비치, 말코비치?)와 Scottish national orchestra의 연주(Chandos, CD, 1989 Gramophone award winner)가 있습니다. 코간에서 늘 느끼는 것인데 현대음악 쪽에 조금 약합니다. 심리적인 스토리 구성을 끝까지 끌고 가는데 조금 약점이 있어 보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음색과 연주기법에도 조금 보수적인 것 같습니다. 이 연주도 유명해서 Arrlechino 복각cd에 보면 the famous studio recording with Kondrashin이라고 까지 명시돼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긴장감이 풀린 연주라 심심합니다.
거기에 비해 Chandos연주는 대단합니다. 사실 이 음반을 언제 샀는 지도 기억이 안나고 몇 번 들은 기억이 없는데 신보를 산 것 같은 신선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팽팽한 바이올린의 톤으로 시종일관 긴장을 잃지 않으며 어택도 대단해서 듣는 즐거움도 줍니다. 표현의 입체성도 좋고 중간에 길을 잃고 헤메지 않습니다. 대단한 연주입니다.

오이스트라흐는 헌정자답게 정말 훌륭한 연주를 들려줍니다. 더군다나 므라빈스키가 협연한 것이라 쓸데 없는 군더더기 빼고 순수 알멩이만 남긴 체조선수 같은 연주입니다. 그림으로 말하면 세한도 같기도 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이 곡이 지닌 비극적 에너지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으며 바이올린은 그 위에 심리적인 포물선을 그리면서 활공합니다. 3악장은 너무 슬픕니다. 구체적 정서가 아니라 다른 우주에 홀로 유배당한 듯한 대단한 이질감과 분리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정서입니다. 그냥 눈물을 흘리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폐부를 꽉 찌르는 흉통을 문자 그대로 느끼게 하는 연주입니다. 너무 슬프면 눈물도 안 나오고 대신 가슴이 아픕니다. 에너지가 팽배한 강한 육질의 연주입니다. CD가 있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 글 : 조홍근님

'[취미생활] > Clas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New York Philharmonic Episode   (0) 2009.04.27
지휘자와 그 역할  (0) 2009.04.27
하이든 교향곡에의 초대  (0) 2009.04.27
마태수난곡   (0) 2009.04.27
음악사 연대표   (0) 200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