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명피아니스트들
피아니스트의 삶은 주사위 놀음인가?
여행 가방 하나를 단촐하게 챙기고 연주 여행을 떠나는 피아니스트들... 이런 모습은 현악기 연주자들 특히 첼리스트처럼 큰 악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음악가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피아니스트의 음악 인생 뒤에 감추어진 불안, 초조, 도전 등을 함축하는 어떤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에게 닥칠 문제는 무엇인가? 그 가운데서 악기의 문제는 피아니스트의 삶을 일종의 주사위 놀음 같은 도전속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많은 연주가들이 고백하고 있듯이 악기의 상태는 그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연주의 성패를 결정짓는 최대의 변수인 것이다.
호로비츠 또는 '마지막 낭만주의자'
그러나 따지고 보면 피아니스트가 이러한 '불안한 삶'을 살게 된 것은 보편적인 것도 전 시대적인 현상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은 전속 조율사까지 대동하고 순회연주를 했던 것이다. 호로비츠의 유일한 제자였던 바이런 재니스도 한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예를 들어 리스트는 뵈젠도르퍼를 가지고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리스트 선풍을 일으켰고, 우리에게는 지휘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한스 폰 뷜로우는 뵈젠도르퍼와 벡슈타인을 가지고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윌리엄 후퍼(William Hupfer) 같은 조율사는 파데레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전속 조율사로서 이들이 연주 여행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의 피아노를 손보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올해로 타계 11주년(1989년 타계)을 맞이하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생전에 자신 소유의 스타인웨이를 가지고 연주를 했던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전통의 계승과 연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는 프란츠 모어(Franz Mohr)라는 스타인웨이의 전속 조율사에게 자신의 악기 조정을 전담케 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호로비츠가 자신을 가리켜 '마지막 낭만주의자' 라고 했던 것이 흰소리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음악 인생 그 자체도 낭만주의의 전통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출간된 모어의 자서전 [위대한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한 나의 삶(My Life with the Great Pianists)]에 의하면 호로비츠는 다섯 대의 스타인웨이를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이들 악기의 시리얼 번호는 CD186, CD314 503, CD223, CD75, CD443 이다) 어느 악기나 그의 독특한 요구에 맞도록 조정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호로비츠 특유의 피아니즘, 즉 더 이상 투명할 수 없는 찬란한 음색, 잔물결이 치는 듯한 레가토, 이보다 더 작을 수 없으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는 피아니시모, 강철같은 울림으로 청중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오싹한 느낌의 포르티시모 등이 아무 피아노에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그의 음악은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뒤에는 모어 같은 조율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과거를 찾아 나선 트랜크너-쉬파이델 듀오와 플레트네프
그렇다면 호로비츠가 도쿄에서 경험했다는 스타인웨이의 음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언뜻 불가능할 것 같지만 20세기 초, 중반에 제작된 스타인웨이의 음향을 들어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녹음(RCA)을 들어보면 그 당시의 피아노가 어떠한 특색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녹음이 주로 SP시절의 녹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당시 녹음 기술의 수준과 한계로 인하여 녹음과 오디오 시스템의 재생음에 대하여 웬만큼 정통하지 않고서는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 출신의 연주가들인 에벨린데 트렌크너와 존트라우트 쉬파이델 두오가 바로 1901년산 스타인웨이(독일산인지 미국산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함부르크에서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MDG레이블을 통해 음반을 접할 수 있다. 이들이 연주하는 바흐-레거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전곡과 브루크너-말러의 교향곡 제3번등의 피아노 듀오 편곡 녹음에서 들을 수 있는 음색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의 스타인웨이는 스타인웨이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지만 액션, 음색, 다이내믹등에 있어서 현대의 악기와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악기의 음향은 스타인웨이 특유의 금속성 음색이 다소 약해지고 다이내믹레인지도 요즘 악기와 비교해 보면 폭이 좁은 듯하며 액션도 조금 부드럽고 악음도 둥근 윤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통합해내는 악기의 공명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깊이와 파스텔 톤의 색감을 가지고 있다. 마치 캄캄한 동굴 깊은 속에서 한 올 한 올 끌려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플레트네프가 녹음한 연주에서도 이와 유사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음반은 라흐마니노프가 소유했던 스위스 루체른의 별장에서, 그가 소유했던 스타인웨이(1940년대 제작)를 가지고, 그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했던 프로그램을 플레트네프가 재현한 것이다. 이 악기의 음색은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둥근 테두리의 악음,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 주는 폭넓은 스케일감, 두터우면서도 확신감이 훌륭한 저역, 장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하지만 화사함을 잃지 않는 고역, 탄탄하면서도 올이 굵은 중역 등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시대에 따른 차이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트렌크너-쉬파이델의 연주에서와 같은 독특한 색감의 울림은 살아나온다.
루빈슈타인 또는 '새로운 것을 찾아서'
그러면 이쯤에서 모어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는 호로비츠와 루빈슈타인의 피아노에 대한 취향을 비교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까다로움을 피웠던 호로비츠와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던 루빈슈타인은 이처럼 대조적인 사람이었다. 이럴 때 그의 피아니즘이 거침없이 음악앞에 다가서는 과감하고 자유분방?음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난 그에게도 '스프레이 사건'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 사건은 모어가 루빈슈타인을 처음 만난 공연인 1963~64년 시즌 뉴 헤븐에 있는 예일대학의 울시 홀(Woolsey Hall)에서 일어났다. 루빈슈타인의 피아노를 조율하면서 모어가 건반을 깨끗이 닦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루빈슈타인은 건반을 닦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늘 밤 연주를 하지 못할 것 같군요. 누구라도 내 건반을 닦으면 건반이 너무 미끄러워져 연주를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미 오케스트라 단원과 청중은 모두 입장한 상태였지만 베토벤의 '황제'가 저 멀리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때 한 사람이 묘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헤어 스프레이를 건반에 뿌리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루빈슈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바로 뒤에 모어가 주연한 촌극이 연출되었다.
"드디어 누군가가 걸어나오자 사람들은 연주회가 시작되는 줄 알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계속 피아노쪽으로 걸어가서 치이익~ 치이익~ 소리를 내며 건반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프레이가 모든 건반에 뿌려졌는지 확인해 가면서 위 아래로 골고루 뿌렸다. 다 뿌리고 나서 확인을 해보니 건반 전체에 미끄러운 부분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던지 일부는 웃고 일부는 계속 박수를 쳐댔다. 나도 어쩔 줄 몰라 몇 차례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왔다. 10분 정도 기다린 뒤 루빈슈타인은 무대로 걸어나갔고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루빈슈타인은 그때의 건반 감촉을 너무도 좋아하게 된 나머지나는 그 뒤로도 그가 가는 곳마다 헤어 스프레이 캔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는 건반이 깨끗하건 더럽건 간에 내가 스프레이를 뿌려주길 바랬다! 스프레이를 뿌리면 그가 좋아하는,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증언은 루빈슈타인의 연주 스타일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그의 연주 장면을 담고 있는 영상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스타일은 피아노를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룬다기보다는 오히려 두드린다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로 손목과 손가락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건반의 청소 상태가 그와 같은 연주 방식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빌헬름 박하우스 또는 부드러운 강철?
박하우스를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강철같은 타건', '단단한 울림', '독일적 관념주의' 등등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그의 피아니즘을 한편으로는 잘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반면 일부에서 '멍멍한'소리를 낸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는 뵈젠도르퍼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섞이는 음색, 소박한 듯 하지만 풍성함을 잃지 않는 독특한 색감의 울림, 다소 좁은 듯 하지만 음색과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다이내믹 레인지 등등의 요소가 단정하게 제시되는 악기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뵈젠도르퍼는 단순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연주가들이 선호하는 악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부 유럽권의 정통 레퍼토리에 대한 빈 스타일의 해석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악기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악기는 음색 자체가 그리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에게는 다루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호로비츠의 포르티시모와 박하우스의 포르티시모를 비교해 보자.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두 연주가의 피아니즘 뿐만 아니라 두 악기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중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음색의 클리핑 포인트' 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쉽게 설명하면 이것은, 음량이 커질 경우 일정 수준까지는 악기가 그 자체의 음색을 유지하지만, 어느 정도의 음량에 도달하고 나면 음색과 음량 사이의 균형이 깨져 더이상 그 악기의 음색을 유지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것은 연주가들이라면 무의식적으로 또는 직관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나면 호로비츠의 포르티시모에서만 느껴지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 호로비츠의 경우 이 클리핑 포인트는 대체로 메조포르테에 맞춰져 있다. 이 말은 메조포르테에 도달하게 되면 피아노의 음색이 무너지며 더 나아가 포르티시모에 이르면 피아노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가 재생되는 듯한 엄청난 파괴력이 피아노에서 나오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느낌은 피아니시모를 얼마나 작게 연주할 수 있는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바로 여기에 호로비츠가 스타인웨이를 선호가는 한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호로비츠 말고 이러한 파괴력을 보인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부조니의 제자였던 에곤 페트리(Egon Petri) 정도일 것이다. 그런 반면 박하우스의 포르테시모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연주에서는 어떤 음량에서도 피아노의 음색이 유지되는 모습이 관찰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연주법에 달린 문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타인웨이를 연주한다고 해서 모든 연주자가 호로비츠와 같은 파괴력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포르테에 클리핑 포인트를 설정하고 있다. 이 점은 브렌델, 아라우, 페라이어 등의 연주를 들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아라우, 쉬프, 루푸의 '꿈꾸기 위한 악기'
클라우디오 아라우, 안드라스 쉬프, 라두 루푸, 이들 세 연주가를 관류하는 공통점은 현대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끌어내는 음악가들이라는 점이다.
아라우의 피아니즘은 벨벳 사운드를 자랑하던 모이셰비치의 그것이나 코르토 류의 감각적인 울림과는 품격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연주했던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등등의 어느 녹음에서나 발견된다. 어느 작곡가에 대해서나 자신의 스타일로 접근해 들어가지만 그 작곡가의 핵심적인 음악 언어를 찾아내는 그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스타인웨이는 더 이상 강철같은 이미지의 악기는 아니다. 이러한 피아니즘은 아라우의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뚜렷해졌는데, 그의 '최후의 녹음(The Final Session)' 시리즈로 오면 그 자신이 추구했던 피아니즘의 정점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 안드라스 쉬프와 라두 루푸는 어떠한가? 먼저 이들 또한 '뵈젠도르퍼 맨'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루푸의 슈베르트 녹음(Decca)을 들어보면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다듬는, 이른바 '시정(詩情) 넘치는 울림'이란 뵈젠도르퍼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향일 것이다. 그는 뵈젠도르퍼에 '투명함' 을 얹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숨은 듯 내비칠 듯한 뵈젠도르퍼의 부드러운 음색에 얹어진 투명함! 바로 이것이 루푸의 서정적 피아니즘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투명함에 신중함까지 곁들이고 있는 음향은 쉬프가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과 <골드베르크 변주곡>, 슈베르트 소나타 전집, 모짜르트의 협주곡(이상 Decca), 베토벤의 협주곡(Teldec) 등의 녹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는'아련함'과 '탐미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해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낭만주의적 해석'과 '음향에 대한 현대적 부활'이라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으며, 뵈젠도르퍼가 그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 퍼온이 주: 쉬프는 바흐 연주에 있어서는 스타인웨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맨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빌헬름 켐프와 벡슈타인의 극소주의 미학
생각해 보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관한 한 오로지 빌헬름 켐프만 존재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음반의 수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즉 성음의 라이센스 음반이 우리의 클래식 음반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에 피아노 애호가들은 그의 연주만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흔해서였을까? 켐프만큼 그 실상이 잘못 알려진 음악가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벡슈타인이 없었다면 켐프의 음악적 이념은 상당히 다른 각도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가 뵈젠도르퍼나 볼드윈으로 베토벤을 연주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리라. 스타인웨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도 같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피아니즘은 상당 부분 변형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켐프의 극소주의 미학에 토대를 둔 피아니즘은 현재에 와서는 그의 제자이자 또다른 '벡슈타인 맨'인 게하르트 오피츠에 의하여 좀더 다이내믹한 차원으로 계승되고 있다.
브렌델의 '초월을 위한 피아노'
먼저 알프레드 브렌델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인웨이 맨'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쇼팽은 아예 연주를 하지도 않을 정도로 레퍼토리의 편식이 심한 음악가라는 점도 그를 이해하는 한 가지 포인트가 된다. 에트빈 피셔의 제자인 그의 피아니즘은 작품 전체의 극적 구조를 꿰뚫는 통찰력과 이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논리정연하게 끌어내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그가 만들어내는 음색은, 80년대 들어 과거와는 달리 명료한 울림을 추구하는 변화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투명하거나 화려한 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피아니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아노에 대한 그의 철학적 또는 미학적 관점이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피아노는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악기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역할을 수행할 때까지 기다리는 악기인 것이다. 피아노의 음향은 실제 피아노가 아닌, 다른 무엇처럼 들려야 한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목소리도 되어야 한다. 피아노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음악에 있어서 멜로디 라인과 성악적인 특성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초월되어야 하는 악기' 라는 그의 생각을 알고 나면, 60년대의 베토벤, 슈만(이상 VOX), 70년대의 베토벤, 슈베르트(이상 Philips) 등의 녹음에서 그가 들려주는 어딘지 단조로운 음색, 선율선의 긴 흐름, 풍부한 공간감을 끌어내는 페달링, 거시적 구도 속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다이내믹 처리와 프레이징 등등이 유연하게 제시되는 그의 피아니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초월 지향적 피아니즘은 감각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초월하는 관점 즉 음악의 내적 논리와 미학적 지향점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아라우의 '꿈꾸는 자의 아름다움'과는 시각과 차원을 달리하는 스타인웨이의 세계를 펼쳐낸다. 그것은 감각적 측면을 배제한 초월 지향의 몸짓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스타인웨이를 자신의 음악 철학과 그것을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그릇'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한편 브렌델의 연주사에서 흥미를 끄는 점은 60, 70년대에 그가 고수했던 이러한 관점이 80년대에 들어와 그의 세번째 베토벤 전집과 두번째 슈베르트 전집으로 오면서 음악에 있어서의 감각적 측면에 대하여 일정한 배려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그가 속해 있는 필립스 레이블의 전속 프로듀서가 빌헬름 헬벡에서 폴커 슈트라우스로 바뀐 것이 한 가지 원인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의 피아니즘이 형식과 내용 사이의 새로운 변증법적 통일을 향한 변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퍼온이 주: 브렌델의 쇼팽 레코딩이 있습니다. 맨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와일드, 볼레의 볼드윈
앞에서 아라우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50년대에 그가 볼드윈을 연주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볼드윈을 말하려면 호르헤 볼레와 얼 와일드를 빼놓을 수 없다. 50년대 이후 치프라, 아라우와 함께 리스트 연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볼드윈을 연주한다는 사실은 범상히 보아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볼드윈의 이러한 특성은 얼 와일드와 호르헤 볼레 등이 보여주는 개성과 대단히 잘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채도가 높으면서도 투명한 음색으로 만들어내는 정감어린 분위기, 강력한 타건으로 만들어 내는 강직한 다이내믹, 기계적인 듯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끌어내는 정연한 프레이징 등등을 구사하는 와일드의 피아니즘은 볼드윈에서 최고의 표현을 끌어낸다. 이러한 모습은 1981년 11월 카네기홀 연주 실황 녹음(Audiofon CD72008-2)에서 잘 확인된다.
그런데 볼레의 피아노를 이야기할 때 흥미를 끄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벡슈타인을 연주하여 녹음한 음반이 간혹 눈에 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리와 코바세비치의 피아노 - 나를 위한 피아노를 찾아서
지독한 연습 벌레, 급작스러운 연주회 취소 등으로 수많은 일화를 뿌리고 다녔던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그의 피아니즘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궁극의 경지에 대한 절대적인 갈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최상의 상태가 아니고서는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그의 고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악기도 스타인웨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스타인웨이 전속 조율사 프란츠 모어에 의하면 그의 피아노 선택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야기는 그가 미국에 처음 건너와서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열 즈음으로 거슬러 올러간다. 이 때 그는 스타인웨이사를 방문하여 지하실에 비치되어 있는 피아노를 모두 쳐보았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피아노는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지막 선택으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홀에 비치되어 있었던, 대단히 훌륭한 악기인 시리얼 넘버 CD15를 보기 위하여 공장을 방문했고, 마침내 미켈란젤리는 이 악기에 만족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은 공연 당일에 일어났다. 미켈란젤리가 새 피아노에 적응하기위하여 미친 듯이 연습을 하는 것까지는 나무랄 일이 아니었지만, 도대체 모어에게 조율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모어가 이 정도였다면 정작 미켈란젤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궁극을 추구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자의 마음을 물어 무엇하리!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이 피아니스트의 삶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피아노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삶!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충족시켜줄 피아노를 찾아 나서는 삶! 이쯤 되고 보면 최고의 악기를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현악기 연주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악기 연주자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악기를 고르는 것이 아니듯이, 피아니스트에게도 악기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최근 베토벤과 슈베르트 연주의 대명사처럼 부각되고 있는 스테판 코바세비치. 그 또한 그의 스승인 마이라 헤스와 마찬가지로 '스타인웨이 맨'이다. 그러나 피아노와 관련하여 보면 그처럼 극적인 변신을 한 음악가도 거의 없을 것 같다. 60,70년대 필립스에서 녹음한 그의 연주는 한 마디로 자유분방함과 다이내미즘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최근 EMI에서 녹음하고 있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에서 그는 이러한 면모를 완벽하게 일신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탐미주의적 울림과 다이내미즘이 거의 완벽하게 결합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신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채워줄 악기와의 만남이 감추어져 있다. 최근의 녹음에서 그가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로열 페스티발 홀에 있는 스타인웨이다. 그는 이 피아노를 가지고 거의 호로비츠를 연상케하는 다소 좁은 듯한 스케일, 투명하면서도 화려한 음색, 비단 실을 뽑아 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깨끗한 잔향, 강렬함 속에서 정연함을 잃지 않는 다이내믹 등등을 결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피아노는?
음악가에게 있어서 악기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음악가의 음악적 이상을 구현해 주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악기의 중요성은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도 절대적 과제라고 할 만하다.
왜 그러면 악기를 찾아야 하는가? '음악의 진실'이란 음악가와 악기가 만나서로 기가 이어지고 혼이 통하여 혼연일체의 한몸을 이룬 곳에서만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음악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기에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만을 위한 악기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옆에 피아노가 있다면(무엇이든 상관없이) 애정을 가지고 보살펴 주셔요. 피아노는 관심과 사랑을 주는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보답을 한답니다. 피아노는 6개월에 한번은 밥(조율)을 줘야 합니다...^^
- 월간 피아노 음악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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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7 퍼온이 덧붙임]
* 쉬프는 Thomas May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습니다(출처: http://www.andante.com/article/article.cfm?id=12727) - TM: You always perform Bach in concerts on a Steinway? - AS: For Bach, yes. Because - when it's good - the Steinway is a perfect objective instrument. Anything like a Bösendörfer or a Bechstein - which I very much like - is much too subjective. The Steinway is a perfect instrument for Bach's voice to come through.
* 또한 쉬프의 바흐 인벤션 음반 커버를 보니 스타인웨이를 연주했네요:
** 브렌델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Vanguard 시절 쇼팽 녹음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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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피아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 도입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새로운 악기'는 당시 음악가들로부터 배척당한 적이 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그 대표적 인물. 바흐는 크리스토포리가 피아노를 발명했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모두 쳄발로와 오르간용으로, 바흐 자신이 피아노곡이라 지시한 곡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바흐는 피아노를 친 적이 있을까? 결론부터 애기하자면 바흐는 피아노를 친 적이 있으나 그 악기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결코 자주 연주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첫번째. 드레스덴의 고트프리드 질버만이라는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가 크리스토포리의 피아노 액션을 좀더 개량하여 몇 대의 피아노를 다시 만들었고 바흐에게 자랑삼아 그 중 한 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흐는 이 새로운 악기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고음이 부족하다, 액션이 무겁다는 등 투덜거리면서 아무런 칭찬을 해주지 않아서 질버만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고 또 분개했다고 한다.
두번째 설은 다음과 같다.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악기 수집가로도 아주 유명했는데 질버만의 피아노만 14대 정도나 가지고 있었다. 1747년,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대왕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피아노 앞에 앉아 대왕이 준 테마를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주해 보였다. 그리고는 질버만의 피아노에 대해 '매우 훌륭한 악기'라고 아첨을 하긴 했는데, 이 때문에 바흐는 피아노라는 새로운 악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그것을 스스로 연주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며 이후에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쓴 적도 없었다고 한다.
한편 바흐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탈리아의 작곡가 스카를라티(1685~1757) 역시 무수한 클라비어 소나타를 남겼는데 이것도 모두 쳄발로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크리스토포리의 피아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시대 사람인 헨델(1685~1759)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도중 크리스토포리의 공장을 방문해 이'음의 강약을 표현할 수 있는 신형의 쳄발로'에 큰 흥미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새로운 악기 피아노가 그때까지의 하프시코드가 가진 협소한 음량변화의 범위를 뛰어넘는 우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악기의 발명에서 보급에까지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이는 악기의 효과적이고 원활한 보급에 있어서도 큰 무리가 따랐지만 이런 우수한 악기를 받아들이기까지에는 아직 음악가 및 음악 애호가들의 이해와 인식이 부족했던 데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바흐의 악기는?
쾨텐의 궁정기록에 의하면 1719년 완성된 쳄발로를 받아오기 위하여 바흐는 쾨텐에서 베를린으로 갔었다. 3월14일, 쾨텐에 운반된 130타라라고 하는 당시로서 고가의 악기는 [베를린의 미트케에 의한 2단 건반의 대형 프뤼겔]이라고 부르고 바흐가 희망하는 규격으로 발주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음악적으로 보아서 특별한 장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아마 왕후의 악기에 알맞는 장식이나 외견적인 면때문에 고가인 것이 된 것 같다. 요즈음에도 쳄발로의 가격은 그와 같이 결정되는 경李?많다. 그 악기를 얻은 후 바흐의 클라비어 작품은 한층 더 충실해졌다.
*1698년 B.크리스토포리가 피아노를 발안
비엔나 피아노와 영국 피아노
19세기 초까지는 두 종류의 피아노가 전문 피아니스트들의 흥미를 끌었는데 바로 비엔나 피아노('독일 피아노'라고도 함)와 영국 피아노가 그것이다. 각 피아노는 각각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이 중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지지를 받은 피아노는 비엔나 피아노. 이 피아노는 액션이 비교적 가볍고 소리가 적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건반을 누르기 위해 압력을 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 악기는 거의 모두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주요 부분 가운데 현과 조율핀만이 금속이었다. 당시의 건반 수는 61개.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모든 피아노 작품이 바로 이 음역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 있다.
"영국 피아노는 많은 장점을 가졌지만 그 중에서도 악기의 내구성과 충만한 음향은 특기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피아노를 비엔나 피아노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그것은 건반이 훨씬 더 무겁고 깊어서 음을 중복해서 칠 때 해머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 대신 매우 조화롭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멜로디를 연주하기에는 매우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약음 효과는 대단히 좋다."
1820년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 칼크브레너 또한 그의 저서 [연주법]에서 비엔나 피아노와 영국 피아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서로 다른, 비엔나와 영국 피아노는 두 종류의 학파를 창설했다. 비엔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특히 정확하고 깨끗하며 빠른 것이 특색이어서 비엔나에서 제조되는 피아노를 치기가 아주 쉬웠다. 영국 피아노로는 더 충분한 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건반 액션은 무거웠고, 그 나라 연주자들의 연주 스타일이 눈에 띄게 컸으며, 노래하는 듯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한편 영국 피아노의 발전에 기여한 클레멘티가 하나의 학파를 창설하여 영국 피아노의 보급에 큰 기여를 했는데 그 학파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로는 뒤섹, 필드, 크라머 등이 있다."
슈타인 피아노에 열광했던 모짜르트
비엔나 피아노의 초기 시대, 열렬한 지지자였던 모짜르트(1756~1791). 그가 소년 시절에는 대부분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 오르간 등을 쳤다. 따라서 1775년 이전까지 쓰여진 건반악기용 음악들은 대부분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이었다. 그 때문에 이 시기의 음악에는 강약의 변화가 없다.
한편 그 당시 모짜르트가 아우구스부르크에 들를 기회가 있었을 때 그 곳의 저명한 피아노 제작자 슈타인(J.A.Stein)의 피아노를 접해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슈타인 피아노는 하이든 뿐 아니라 베토벤도 자주 사용한 명기였다. 이 피아노의 특징은 비엔나식 액션의 채택에 의해 전달 반응이 빠르며 소리가 고른 것, 그리고 무릎 페달에 의한 댐퍼(진동 제어장치)가 효과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있다. 음역은 5옥타브까지 확장되어 있었으나 현대의 피아노와 비교한다면 건반의 무게는 반 정도이고 해머의 크기도 아주 작았다. 그 때문에 경쾌한 터치의 연주에 적합했는데, 현은 고음부가 강철제이고 저음부는 감겨있는 선이 아니어서 음색도 투명하고 깨끗했다. 모짜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슈타인의 피아노를 접한 후 이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당장 나는 슈타인 피아노를 사용하겠습니다. 슈타인 피아노는 다른 악기엔 없는 특별한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케이프 액션(escape action)을 갖췄다는 것입니다. 피아노 제조업자 가운데 오직 한 명만이 이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쓴 것이죠. 건반을 누른 후 계속되는 지저분한 소음과 진동을 막기란 불가능한데, 건반을 일단 때리면 건반을 누르고 있든 아니든 해머는 줄을 때린 직후 다시 줄에 닿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슈타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피아노 하나를 만들기 위해 직접 피아노에 앉아 여러 종류의 프레이즈, 빠른 음계나 도약 그리고 그외의 어떤 기능이든 가능해질 때까지 계속 만지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음악적인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중에 그만두었을 겁니다.
이 편지에서는 모짜르트가 단순히 연주만 하는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피아노의 제작과정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언급한 '무릎을 쓰는 방법'이란 즉 '페달'을 말하는데 그 당시의 영국 피아노는 오늘날과 같은 페달을 이미 갖추고 있었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발로 누르는 페달이 보편화되기까지는 그 후 수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슈타인은 피아노 가격을 매우 비싸게 불렀고 그 때문에 불행히도 모짜르트는 슈타인 피아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 후 모짜르트가 소유하게 된 피아노는 비엔나의 발터(A.Walter)가 1784년 경에 만든 것이었다(1780년대 비엔나에는 슈타인 유형의 피아노 제작자가 상당수 있었던 듯 하다. 이들 중 두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발터와 샨츠(J.W.Schanz)이다.). 이 악기는 슈타인 피아노와 같은 페달은 없었지만 무릎 대신 발로 움직이는 페달을 발터가 부착시켜 주었고 그 음역은 대략 5옥타브였다.
피아노 제조업자의 길을 걷게 된 클레멘티
클레멘티(1752~1832)는 런던에 와서 열광적인 선풍을 일으킨 피아니스트였다. 연주 여행과 자신의 피아노(마침내 피아노 제조업자가 되었다)를 판매하기 위하여 유럽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국에서만 지냈던 그에게 '클레멘티 스타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공명을 일으키면서도 힘있는 영국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망가뜨리는 데 명수였던 베토벤
베토벤(1770~1827)은 피아노에 '악기의 왕'이라는 명예에 걸맞는 지위를 부여한 작곡가였다. "베토벤과 리스트는 피아노를 망가뜨리는 데 명인이었다"라고 전해지는 말에서처럼 늘 피아노의 성능과 싸워(?) 악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다이내믹한 음악 표현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피아노 제작자들의 의욕을 자극하여 결국 피아노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하겠다.
젊었을 적 베토벤은 빈에서 가장 많은 피아노를 망가뜨리고 부수어버린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다. 그는 피아노의 능력을 최대한 몰아부쳤고 즉흥연주를 하다가 도취되면 피아노를 미친 듯이 두들기기도 했는데, 그러면 약하고 섬세한 피아노의 줄은 여지없이 끊어지고 해머 또한 망가지기 일쑤였다. 베토벤의 손이 닿기만 하면 어떤 피아노도 온전하지 못했는데, 한 번은 음악회에서 화가 난 상태로 피아노를 치다가 한 순간에 피아노 줄을 6개나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따라서 한창 연주에 몰두하던 그는 이러한 피아노의 한계들로 인해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몹시 불안해 했다고 한다. 그의 놀랄 만큼이나 파괴적인 연주력에 대해선 다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안톤 라이하(Anton Reicha)라는 음악인이 한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악보를 넘겨준 일이 있었다 한다.
"모짜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악보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그가 너무 세게 쳐서 튕겨나간 피아노 줄을 잡아 올리고, 끊어진 줄사이에 낀 헤머를 제자리에 돌려 놓는 일로 더 바빴어요. 베토벤이 협주곡을 마칠 무렵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줄을 잡아당기고 엉킨 해머를 풀고 또 페이지도 넘겨야 했기 때문에 어쩌면 베토벤보다도 내가 더 열심히 연주한 셈이었죠."
베토벤은 일생의 대부분을 비엔나 피아노를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다섯 옥타브의 음역을 가진 피아노를 사용하다가 '발트슈타인'소나타를 시작하면서 여섯 옥타브로 된 피아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피아노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제조가에게 더 견고하고 음향이 좋은 피아노를 만들 것을 계속 권했다. 1817년 이후로 접어들어서는 특별히 음량이 큰 악기를 한 대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베토벤의 악화된 청력 감퇴 때문이었다고.
한편 19세기 초엽 비엔나의 피아노상들은 많은 피아노 선생들을 부추겨 그들이 자기 회사의 피아노를 다른 곳에 파는 데 도움을 줄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신 그렇게 도움을 준 피아노 선생이나 음악가들에게는 관례적으로 일종의 커미션을 주기도.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유명한 음악가의 이름과 명예를 빌려 그 음악가가 자기 회사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자랑할 수 있도록 그 음악가를 악기와 함께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런 식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모두 거절해버렸다. 도덕적으로 볼 때 이러한 관례가 그리 정당치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동료 음악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무수한 피아노 제작자들이 나를 위해 일하려고 안달이 나 있지만 모두 헛수고입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모두 내 마음에 드는 피아노를 만들어주려 하기 때문에 어디서나 공짜로 피아노를 얻을 수는 있지요."라고 쓴 바 있다. 이런 이유들 탓인지 베토벤은 최고급 에라르 피아노를 한 대 얻을 수 있었다.
"브로드우드가 베토벤을 위해 피아노를 만들었다"
사실 베토벤은 평생동안 단 한 대의 피아노도 사지 못할 정도로 경제력이 풍족치 못했다. 그가 평생동안 사용한 피아노는 전부 6대 정도였는데, 모두 선물로 받거나 빌린 것이었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마음에 꼭 드는 피아노를 만나기까지에는 무척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피아노 제작 회사인 브로드우드사의 존 브로드우드는 1818년 베토벤의 마음에 꼭 드는 훌륭한 그랜드 피아노를 한 대 보냈다. 이것은 그 시대에 흔히 사용하던 하프같이 연약한 피아노와는 전혀 다른, 음향이 매우 큰 피아노였을 뿐 아니라 사이즈가 확대된 비엔나 피아노보다도 고른 톤을 가졌으며 베이스쪽의 음역도 확대되어 있었다(브로드우드 사는 베토벤에게 이 피아노를 보내고 3~4년 뒤 피아노의 틀을 금속으로 만든 더욱 튼튼한 제품을 탄생시켰다). 이 브로드우드 피아노의 액션은 크리스토포리 질버만의 원리를 발전시킨 소위 '밀쳐내는 액션'으로 비엔나 피아노의 '튀어오르는 액션'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이는 휠씬 무겁고 연주하기가 어렵긴 했으나 보다 큰 음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또한 힘과 울림, 음역에 있어서도 당시 어느 피아노와 견줄 만한 것이 없는 훌륭한 제품이었다. 마침내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에 거의 부합하는 피아노를 갖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피아노의 운반과정이었다. 브로드우드 피아노는 베토벤의 방에 놓이기까지 매우 수고스런 여행을 해야 했다. 당시엔 철도가 없었으므로 악기는 런던 선창에서 배에 실려 지브랄터 해협을 지나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운반되었다. 거기에서부터 비포장된 산길 도로를 지나고 마차에 실려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수없이 덜커덕거리면서 360마일 이상을 여행했다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어렵사리 자신의 방에 놓여진 대형 피아노에 흡족했던 베토벤은 이후로는 이 악기만을 썼다. 브로드우드사는 "브로드우드가 베토벤을 위해 피아노를 만들었다!!"는 사실로 상당한 광고 효과를 얻었는데,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의 음악 애호가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반 위에 기증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이 피아노는 1827년 베토벤이 사망한 후 경매에 붙여졌고 수리, 복원되어 그후 리스트의 손에 넘겨졌으며,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국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베토벤 소나타와 피아노와의 밀접한 관계
베토벤은 모두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다. 그가 일생동안 사용했던 비엔나의 월터나 슈타인 피아노, 프랑스의 에라르 피아노, 영국의 브로드우드 피아노의 특징은 베토벤 소나타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피아노의 건반 수(음역)이다. 베토벤은 그때마다 사용하던 피아노의 건반을 최대한 이용하여 작곡했다는데,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와 피아노 소나타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활동 초기(1782~1802)에는 61건짜리 월터제 비엔나 피아노를 주로 사용했다. 이 피아노의 음역은 1F~f3로,그가 이 피아노로 작곡한 1800년 전후까지의 작품에서는 최고로 높은 음이 반음정도 부족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그 음을 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중기(1803~1816)에는 68건의 에라르 피아노를 사용하며 1F~c4의 음역을 [소나타 21번 Op.53 '발트슈타인']에 반영했다. 저음 반복음에서부터 갑자기 최고 음역으로 도약하는 선율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역시 이 시기에 쓰여진 [소나타 제23번 Op.57 '열정']의 3악장에서도 이 피아노의 최고음c4가 사용된다. '열정'소나타와 그 다음에 나온 소나타 사이에는 몇 년의 공백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베토벤에게 있어 피아노는 음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였으나 베토벤이 [피아노 협주곡 제6번]의 작곡용 소묘를 시작할 즈음에는 그의 귓병이 크게 악화되어 공개 석상에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아노에 대한 베토벤의 태도가 변했고,제24번 소나타에서 그러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활동 말기였던 1817~1823년 사이에는 앞서 언급한 브로드우드제 피아노(1C~c4, 73건)만을 사용했는데, 이 때 대작 [소나타 제29번 Op.106 '함머 클라비어']가 탄생되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피아노에 비해 낮은 음역의 건반이 늘어남으로 무엇보다 울림이 풍부해졌기 때문에 '함머 클라비어'소나타를 비롯한 최후의 소나타 3곡에서는 넓은 음역이 아주 적절하게 쓰여졌다.
플레이엘 피아노와 일생을 같이 한 쇼팽
19세기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시대라고 불려지며 고전파에서 낭만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대로 눈부신 음악의 발전을 계속해 왔다. 피아노에 있어서도 1800년대 초부터 피아노의 교차현이 특허를 얻고, 댐퍼 제작이 발 페달식으로 바뀌며, 연타 가능한 더블 이스케이프먼트 액션의 개발, 주조 프레임 제작, 펠트 해머 고안, 강철현 사용, 그리고 음역도 7옥타브(85건)까지 확대되는 등 현대의 피아노 구조가 이때 거의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바로 이때 '쇼팽'과 '리스트'라는 명 연주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연주뿐 아니라 작품에 있어서도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유감없이 발휘해냈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것처럼 섬세하고도 환상적인 피아노 특유의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때론 불같이 정열적인 면도 있었으나 피아노라는 악기가 화려한 기교를 낼 수 있는 악기일 뿐 아니라 섬세한 감정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그는 파리를 떠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결같이 우아한 음색의 프랑스제 플레이얼(Pleyel) 피아노를 애용했다.
"내 몸의 컨디션이 나쁠 때는 에라르 피아노를 칩니다. 왜냐하면 크게 애쓰지 않아도 좋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죠. 그러나 기분이 좋고 몸의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개성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플레이얼 피아노를 선택해요."라고 남긴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는 쇼팽의 이미지와 부드러우면서도 개성적인 음색을 지닌 플레이얼 피아노는 왠지 잘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가끔 쇼팽의 제자들이 레슨을 받으러 와 그의 플레이얼 피아노로 연주할 때면 건반이 가벼운 탓인지 피아노 줄을 자주 끊어버려 쇼팽에게 매우 미안해 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쇼팽은 "괜찮네, 만약 나도 자네처럼 힘이 넘쳤더라면 피아노 줄을 여러 번 끊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힘이 있진 못하다네."라고 오히려 그 제자를 위로했다고 한다.
쇼팽이 플레이얼 피아노를 접하게 된 것은 스승 칼크브레너의 영향이 컸다. 젊은 시절, 고향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 쇼팽은 자신의 능력이 이 대도시에서 어떻게 평가될지 불안해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 피아노계의 거장인 칼크브레너를 찾아가 지도해 달라고 청했는데, 이에 칼크브레너는 쇼팽에게 가르칠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한 피아니스트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데 대해 매우 우쭐거렸다. 또한 쇼팽을 설득하여 자신이 큰 관심을 가져오던 플레이얼 피아노를 사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플레이얼 피아노를 접하게 된 쇼팽은 "플레이얼 피아노는 가장 완전한 악기이다."라고 밝히며 이후로도 이 피아노 이외의 것은 거의 치지 않았고, 1848년 그의 마지막 연주회에서도 플레이얼만을 고집했다고 한다.
플레이얼 피아노는 다른 악기 메이커에 비하면 액션이 매우 부드럽고 가볍다. 리스트는 쇼팽의 피아노에 대하여 "플레이얼 피아노의 맑으면서 약간 숨겨진 듯한 소리, 터치의 가벼움 등으로 인해 쇼팽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겼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쇼팽의 제자였던 그레취가 남긴 플레이얼 피아노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자.
"평소에 나는 가벼운 것보다 무거운 건반의 에라르 피아노로 많이 연습하며 손가락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런 무거운 타입의 피아노로 각 손가락뿐 아니라 팔목과 팔 전체의 미묘한 뉘앙스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그것을 쇼팽의 플레이얼 피아노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늘 하던 대로 단단하고 힘있는 에라르 피아노의 연주 기법을 플레이얼에 적용시켜 연주했더니 딱딱하고 조잡하게 변해 버렸다. 쇼팽의 피아노는 부드러운 숨결과도 같았고 때문에 강한 포르테로 무리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쇼팽 역시 피아노를 꽝꽝 두들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쇼팽은 에라르 피아노에 대해 "이 악기는 피아니스트의 터치를 망쳐 놓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연주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리스트는 액션이 딱딱하고 건반이 무거운 피아노를 특별 주문하기도
한편 리스트는 쇼팽과는 대조적으로, 초인적인 기교를 구사하여 청중을 매혹시키는 호쾌한 연주를 했다. 플레이얼 피아노의 제작자 까뮤 플레이얼은 리스트의 연주회가 끝난 뒤 피아노의 상태를 보고는 "마치 극렬한 전쟁 속에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는 말을 남기며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내부의 현이 많이 끊어지고 해머가 부러진 것이 많았기 때문인 듯싶다. 당시 피아노의 제작 기술은 매우 빠르게 발전되고 있었으나 이러한 리스트의 뛰어난 테크닉과 무시무시한 힘을 견뎌낼 수 있는 피아노는 얼마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리스트만큼이나 피아노 제작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액션의 강화와 신속성을 요구했던 연주자는 없었을 것이다.
피아노 비르투오조에 대한 열광적인 도취가 극에 달했을 당시 리스트는 '경이적인' 소년 피아니스트로 유럽 음악계에 선풍을 불러일으켰는데, 에라르는 리스트가 자기 회사의 피아노에 커다란 선전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하여 이 젊은이를 사로잡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에라르는 리스트를 런던으로 데려가 한 콘서트에서 자랑스럽게 선보였던 것이다. 그는 '리스트 리사이틀'에 대한신문 광고 문안에 "12세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가 리사이틀을 연다. 특별히 이번 연주에는 에라르의 새로운 특허품인 7옥타브짜리 그랜드 피아노와 함께 무대에 선다!!"라고 떠벌렸다고 한다. 이를 보면 한 마디로 상업적인 술수에 리스트가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리스트는 이 상술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연주력 및 명예에 플러스 효과를 낳게 했으며, 더 나아가 에라르 피아노로 최상의 기교를 창출하는 이른바 천재 피아니스트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당시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면에서 리스트를 능가할 수 있었던 음악가는 오직 한 사람,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뿐이었다. 리스트는 역사상 최고의 기교가 파가니니를 능가하겠다는 결심으로,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창조해낸 것과 흡사한 효과를 피아노에서 개발해냈다. 그외 리스트에게 영향을 끼친 또다른 음악가는 쇼팽으로서, 리스트는 그의 연주를 파가니니 연주를 접한 다음 해인 1832년에 들었다. 리스트는 쇼팽을 통해 피아노라는 악기가 화려한 기교를 낼 수 있는 악기일 뿐만 아니라 섬세한 감정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의 악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가니니가 초인적인 기교와 화려함에 눈뜨게 했다면, 쇼팽은 피아노 서법이나 화성적 발상, 스타일, 그리고 감정을 다스리는 솜씨를 리스트에게 깨우쳐 준 것이다. 천재 리스트는 이 모든 것을 융합시켰다. 그 결과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성취한 것과 똑같은 화려한 기교에 쇼팽의 색채와 시를 접목하기에 이른다. 리스트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뛰어난 테크닉과 쇼맨쉽 그리고 감성까지를 한데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의 선택에 있어서만은 쇼팽과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했다. 쇼팽은 당시 유럽의 피아노 중에서도 키가 가볍다고 일컬어지는 플레이얼 사의 것을 쓰고 있었던 데 반해 리스트는 무겁고 내성이 있는 터치를 가진 악기로 연습함으로써 손가락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리스트는 자신의 방에 3대의 각기 다른 피아노를 놓고 연습하곤 했는데, 그 피아노들은 그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들로서 액션이 아주 딱딱하고 건반이 무거워 이 피아노로 한 번 연주하면 다른 피아노로 10번 정도 하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한다. 그 피아노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지만 기본적으로 손가락을 단련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리스트의 연주가 초인적인 음량을 들려 주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같은 피아노로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리스트는 줄곧 휴대용 무음 건반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소위 사일런트 피아노였던 이 악기는 마차 속에 고정할 수 있는 장치까지 되어 있어서 잦은 연주 여행 중에 언제나 가지고 다니며 연습할 수 있었다고. 한편 말년에 리스트가 애용했던 피아노로는 뵈젠도르퍼와 벡슈타인이 있다.
한편 벡슈타인도 뵈젠도르퍼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856년 리스트의 연주회에 참석한 칼 벡슈타인은 피아노의 현을 끊어뜨리는 리스트의 강한 타력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에 벡슈타인은 내구성과 함께 아름다운 음색, 조율의 안정성 등이 잘 결합된 피아노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860년 그는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에게 자신의 피아노를 한 대 증정하는데, 훗날 리스트는 "28년 동안 벡슈타인 피아노를 사용해온 나는 그것이 다른 어떤 피아노보다 월등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라는 편지를 벡슈타인에게 보냈다. 이후 벡슈타인은 수많은 음악의 대가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드뷔시는"오직 벡슈타인만을 위한 피아노곡을 쓰겠다."라고 말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벡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피아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피아노의 건반 수는 시대에 따라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모짜르트 당시에는 61건이던 것이 베토벤 시대에는 61, 68, 73건, 쇼팽 시대에는 78, 82건, 리스트 시대에는 78, 82, 85건, 라벨 시대에는 82, 88건, 그리고 프로코피에프 시대에는 현재의 피아노와 같은 88건을 가진 피아노가 사용되었다. 즉 88건의 피아노가 보급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라는 것인데, 20세기에는 규모가 커진 연주홀에 적합한 음량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건반의 길이는 길어졌고 소리도 깊어졌으며 이에 따라 음역(건반 수)도 88건으로 늘어난 것이다.
* 출처 - http://pro.gjue.ac.kr/~firstson/o.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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