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동성애와 가난으로 죽어간 위대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凡石 2009. 4. 27. 21:38

 
 
동성애와 가난으로 죽어간 위대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 관해선, 모차르트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오랫동안 자살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 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한 9일 인 1893년 11월 6일 사망했는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물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콜레라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것은 1세기 동안이나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한편 또 차이코프스키 스스로가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확신한 <비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너무나 냉담했기 때문에 참담한 좌절감으로 인해 자살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독일의 작가 클라우스 만은 바로 이 이야기를 주제로 비창 교향곡이란 소설을 쓰기까지 했다.>
그런데 1978년에 처음으로 이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기록이 공개되었는데, 가장 최근의 차이코프스키 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에 의하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강요된 자살’이었다는 것이다.

         Tchaikovsky with his nephew ->

즉 러시아의 어느 귀족이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귀족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음을 규탄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를 차르에게 전해달라고 고위층 정부관리인 니콜라이 야코비에게 주었다.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법률학교 출신이었던 야코비는 모교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공공연한 추문을 퍼뜨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차르에게 전하는 대신, 학교시절 차이코프스키를 알았던 여섯 사람을 포함한 ‘명예법정’을 소집했다.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10월 31일에 ‘명예법정’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다섯 시간의 토의 끝에 그들은 차이코프스키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자신 평생 두려워했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는 확실히 이 선고에 복종했다. 엿새 뒤 그는 죽었다. 그가 자살에 사용한 독약은 비소였던 것 같다-이렇게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 끔찍하지만, 훨씬 그럴듯하게 들린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적 경향에 대해선 꽤나 많은 이야기들이 씌어졌지만, 참으로 이 동성애 기질은 차이코프스키의 전 생애를 통해 수치와 슬픔의 원천이 되었으며, 삶의 모든 단계에서 그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었다. 전기 작가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를 빌려 차이코프스키의 이 같은 동성애 경향을 그린 그의 모친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그것이 충족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숙명적인 ‘이별의 경험’에 돌리고 있다.


여섯 형제의 둘째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퍽이나 신경질적이고 명상적이며 내성적인 기질을 나타낸 차이코프스키는 어머니에 대해 거의 비정상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열 살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생이 되기 위해 가족과 이별해야만 했었다. 그는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친이 그를 구도 떠나자 그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뛰쳐나와 떠나가는 마차 바퀴에 몸을 던졌다. 프루스트의 경우와 흡사한 이 같은 체험은 영구적 쇼크가 되어 이 작곡가의 미래의 정서를 지배하게 됐으며, 그의 작품은 주요 테마를 위한 토대가 된 것이었다. 즉 그에게 사랑은 숙명적으로 거부되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불행한 결혼생활 역시 작곡가 자신은 그 원인을 자신의 동성애 성향으로 돌렸지만, 그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린시절 그의 앞에서 양구히 문이 닫혀버린 모친에의 사랑과 만나게 된다. 그의 이 거부당한 애정은 영원히 고착된 채, 그로 하여금 다시는 어떤 여성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든것이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 결혼은 문자 그대로 그릐 삶에서 하나의 재난이었다. 그것도 그 자신이 자초한 재난이었다. 1877년 37세때 차이코프스키는 스무살(일설엔 28살)난 음악학교 학생인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류코바란 여성에게서 열렬한 연애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같은 편지는 마침내 차이코프스키가 자기를 만나러 와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으로까지 발전했다.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그녀를 만나러 갔지만, 동성애자인 자신에게 이성에의 사랑은 영구히 거부돼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로선 그녀의 사랑에 자신은 보담할 수 없다는 것을 재치있게 설득시키려고 했다.


<- Tchaikovsky as a student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념하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가 어째서 마음을 바꾸었는가는 곤란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어쨌든 둘이 만난 지 1주일 안에 그는 안토니나에게 구혼했고, 한 달 뒤에 둘은 결혼했다. 후에 차이코프스키가 나테즈다 폰 메크부인에게 쓴 편지속에서 우리는 그가 ‘이 여성의 파멸을 희생으로 하여 그의 자유를 지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통스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결혼을 선택했지만 이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그가 후에 동생에게 쓴 바에 의하면 결혼 당일 밤에 그는 ‘바야흐로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순간에 흐느낌으로 목이 메었다.“ 이들의 결합은 대략 3 개월 동안 지속했는데 어느 날 밤 차이코프스키는 페렴에나 걸려 죽기나 했으면 하고 얼음 같은 모스크바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마침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생에게 도망가서 쓰러졌다. 그리고 이틀 동안 의식불명의 상태로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도 야릇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법률적으로 여전히 부부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녀가 자신의 끔찍한 비밀을 세상에 공개할까봐 겁이 나서 그녀를 내쫓지는 않았으나 다시는 함께 할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요구할 때면 언제나 그녀에게 돈을 보내주면서 생애의 끝까지 그녀의 생계를 책임졌다. 안토니나는 연애행각으로 전전하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게 되는데,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불행이 전적으로 자기 탓이라는 걸 인정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 비슷한 것을 느낀 대상은 나테즈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남편의 유산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게 된 메크부인은 열 구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차이코프스키보다 9년 연상이었다. 결혼하기 얼마 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폰 메크부인으로부터 작곡 위촉을 받았는데, 이걸 시발로 이후 두 사람은 무료 14년 동안(1876년-90년)이나 문통을 계속했으며, 교환한 편지는 1천1백통이나 되었다. 편지 속에서 둘은 음악에 대한 의견과 개인적 속내이야기 그리고 지극히 채색된 사랑의 고백을 서로 교환했다.
부인은 차이코프스키가 안심하고 작곡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 주었으며, 자신의 별장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의 해외 여행땐 모든 비용을 부담했고, 피렌체에선 오랫동안 그의 근처에 살기도 했지만 둘은 결코 직접 만나지 않았다.(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서로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은채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이들의 문통이 두 사람에 대해 지니는 가치는 가정의 일이나 성적 욕구 없이 각자의 사랑을 주고받는 통로 - 두 사람에게 다 절실히 필요했던 -를 이들에게 제공했다는데 있다. 나데즈다 폰 메크 속에서 차이코프스키는 확실히 연인과 흡사한 무언가를 발견했고, 그녀 역시 차이코프스키 속에서 그와 비슷한 무엇을 발견했던 것이다. 음악사들에겐 그녀에게 보낸 차이코프스키의 편지가 그의 작곡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갖는 의미가 이와 같은 것이었던 만큼, 어느 날 느닷없이 확실한 이유도 알 수 없는 채, 둘의 관계가 종언을 고해야 했을 때 작곡가가 입은 타격이 어떠했던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폰 메크 부인과의 문통이 중단된 데서 온 낙담과 울분은 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을 온통 어둡게 채색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는 이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종 때 정신착란의 상태에서 그가 분격에 찬 힐난하는 어조로 계속 ‘저주할 그녀’를 되풀이했다고 전해지는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다.

 

1890년 10월 4일 차이코프스키는 나데즈다 폰 메크부인에게서 그녀가 파산하기 직전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앞으로는 그의 수당을 보내줄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편지의 끝에 가서 둘의 우정역시 끝났다는 걸 암시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이따금 내 생각을 해 주세요”라고 편지는 끝맺고 있었다.

같은 날 차이코프스키는 애정에 가득찬 편지를 보냈으나 그녀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부인의 재정적 곤경이 해소되었고 파산은 더 이상 거론할 여지도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접한 그의 안도감은 곧 원한의 감정과 함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울분으로 바뀌었다. 그는 부인의 마지막 편지가 단순히 ‘최초로 제공된 기회에 가지를 제거해 버리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듯 기묘한 우정에 대한 이와 같이 야릇한 종말 뒤에 숨은 진실을 파헤쳐보려고 가능한 온갖 노력을 다해 봤으나, 끝내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Tchaikovsky familiy ->

 

우정과 애정을 거듭다짐하면서 해명을 청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으나 메크부인에게서 그는 다시는 한 통의 서신도 받지 못했으며,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끝내 그에겐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다만 해명을 요구하는 그의 집요한 편지에 대해 부인의 사위에게서 부인이 심한 신경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어떤 편지에도 답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을 뿐이었다.(실제로 폰 메크부인은 중한 신경병을 앓고 있었던 게 밝혀졌다. 그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비스바덴의 병원에서 차이코프스키가 죽은지 얼마 안된 1894년 1월초에 타계했다.)

이 일이 일어났을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에서뿐 아니라 전 유럽과 미국에서까지 이름난 작곡가가 돼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만큼, 메크 부인에게서 송금이 끊어진 사실이 그를 심하게 낙담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50의 문턱을 넘어선 작곡가는 이때 그의 유명한 오페라 <에프게니오네긴> 과 <스페이드의 여왕>을 비롯해서 <만프레드>교향곡을 포함한 여섯 개의 교향곡, 발레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과 제1번 피아노 협주곡등 아무튼 비창 교향곡을 제외한 그의 모든 걸작들을 작곡한 뒤였다. 파리, 런던, 프라하, 베를린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중소도시를 순회하면서 자작곡을 지휘하였으며, 순회 땐 밴드가 그의 호텔 창 아래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가 하면, 음악계의 고위층 인사들이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모여들고, 숙녀들은 그가 절할 때 무대위에 꽃다발을 던지곤 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받은 타격의 본질은 무엇보다 그의 자존심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데 있었다. 그것은 이후의 차이코프스키의 메크 부인에 대한 태도가 기묘하게 이율배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던 것에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부인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간직했으며, 그렇듯 뜻밖에 닥친 결별에 대한 그의 슬픔은 진정 순수하고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즉 그는 둘의 관계를 ‘혐오와 수치로 가득 찬 진부하고 어리석은 웃음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M.D.칼보코레시는 매우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 이상적인 우정은 이제 그에겐 부유한 여성의 단순한 변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그녀의 마지막 편지는 그가 죽는 날 까지 그의 가슴속에 사무쳐 있었다.”

이 이별이 있고 나서 몇 년간 차이코프스키는 언제나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녔다. “흡사 그는 그를 이곳저곳으로 멋대로 몰고 다니는 어떤 맹목적인 힘의 희생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그에겐 항상 모은 장소가 현재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작곡가의 동생 모데스트는 술회하고 있다. 따라서 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은 여행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여행은 그에게 일종의 도치였다. 1892년 12월17일 발레 <호두까기 인형>과 오페라<이오란테>가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받을 때도 그는 서구로 도피했다. 대체로 러시아의 비평가들은 차이코프스키에게 호의적이 아니었고 데가다 차이코프스키는 신문의 리뷰나 비형에 언제나 지극히 민감했다.

“모든 신문이 나의 두 작품을 난도질하고 있는걸 보는게 이젠 지긋지긋해 졌어”라고 그는 동생 아나톨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불평하고 있다.

 

<-- Tchaikovsky and wife .July 1877

 

그러나 이 시기는 차이코프스키의 명성과 그에 대한 평가가 - 특히 러시아에서보다 서구에서와 미국에서 어느 때보다 높은 때이기도 했다. 1891년 4월의 미국 초청여행과 1893년 6월에 있었던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의 음악박사 학위수여에서 그것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의 침울한 기분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그는 도피로서 택한 여행은 그에게 기대했던 위안과 안정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여행 중에 가장 사랑하는 누이 알렉산드라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종종 그는 이른 아침부터 눈물에 젖어 있기가 일쑤였고 죽도록 향수병에 시달렸다. '눈물의 발작‘, 노스텔지어, 회향병, 불안, 외로움 따위의 표현은 그가 사랑하는 조카 보브나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의 곳곳에서 보인다. 아니 여행 중에 그가 고국에 보낸 거의 모든 편지에서 우리는 이 같은 낱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것은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전 삶의 기본 모티브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고칠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려온 작곡가는 사실 50세에 이미 노인처럼 보였다. “그가 어찌나 늙었던지, 담청색 눈을 보고서야 겨우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라고 어떤 친구는 당시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곡가 자신도 당시 조카 보브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자신의 처량한 자화상을 다소 과장되게 그려 보이고 있다.

“늙은 친구는 점차 기진맥진해지고 있다네. 머리는 눈처럼 희게 변하고 이미 떨어지기 시작하는데다 이빨까지 빠지고 있어, 눈은 점점 침침해지고 금세 피료해질뿐 아니라 이제 발까지 질질 끌기 시작하니, 어떤일을 성취하기엔 그는 너무나 쇠약한 되고 말았구나.”
베를린과 파리 브뤼셀을 돌고 난 뒤 오데사를 거쳐 고되고 오랜 여행에서 완전히 지쳐 1893년 2월초 클린의 집으로 돌아온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에겐 미래가 없다’는 상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다시 한번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나의 신념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의 역할은 끝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라고 그는 동생 오데스트에게 쓰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산산조각난 자신의 신념을 끌어모아 다시 한번 붕괴된 자신의 삶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그것이 바로 제 6 번 교향곡으로 종결된 셈이었다. 이것으로 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되었으니, 세계는 이 교향곡을 그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창>은 -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사랑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 운명에 의해 좌절된 자의 철저한 패배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비창>속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전 생애를 총괄하고 있으며, 평생을 일관한 그의 염세관에 대한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다. 1893년 2월23일 조카 보브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처음으로 <제 6 교향곡>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행을 마악 떠났을 때(1892년 12월 파리방문) 새로운 교향곡에 대한 착상이 떠올랐단다. 이번엔 프로그램(표제)음악이 될 것인데,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모든 사람에게 수수께끼로 남을 거야. 누구나 스스로 그걸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거지. 제목은 ”프로그램 심포니“(제6번)가 될거야. 이 프로그램은 주관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 여행 중 마음속으로 이 음악을 작곡하는 동안 나는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단다. 이제 집에 돌아와 작곡을 하면서 아직도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내가 아직도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니.....”

작품의 진척은 무척 빨랐으나 친구이며 출판업자인 유겐슨의 위촉에 의한 작품을 쓰느라 한동안 중단되었다. 이때 작곡한 음악이 작품72의 열여덟 개의 피아노 소품을 비롯한 여섯 곡의 가곡, 작품73(군대행진곡), 그리고 모차르트의 4성부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4번의 편곡 등이었다.
<비창>이 완성되었을 무렵 차이코프스키가 출판업자 유겐슨에게 써 보낸 승리에 찬 편지를 보면 그가 이 음악을 자신의 최상의 작품이라 확신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나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자기만족, 이와같은 자부심, 이와같은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소. 내가 이처럼 훌륭한 것을 창조할 줄은 몰랐소.”

또한 조카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이 작품을 새로움 때문에 음악대중의 반응이 신청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듯 하다.

“설사 이 새 교향곡이 처음엔 욕을 먹거나 신통치 않은 평가를 받는다 해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모든 작품 가운데 틀림없이 가장 최상의 것, 확실히 가장 성실한 작품이라 생각해. 이전에 나온 나의 어떤 음악보다도 나는 이 음악을 사랑하고 있거든.”


1893년 10월28일 <비창>은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으나(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 음악협회에 의해 시즌의 개막공연으로) 작곡가가 이야기 했던 대로, 일반의 열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고, 신문의 논평들도 하나같이 미지근했다. <비트제프야 비예도모스티>라는 신문에서 단 한 사람의 비평가만이 유보없는 찬사를 보내주었을 뿐, 나머지 모든 신문들은 예외없이 <노보예 레미야>지의 의견을 합창처럼 반향하고 있었다. 즉 “영감에 관한 한 이 작품은 다른 교향곡들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생을 통해 신문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의 적대적인 비형에 대해 언제나 지나치게 민감했던 차이코프스키였지만, 이번만은 이 모든 논평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심포니가 자신의 최고걸작이라는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신념은 요지부동이었다. 연주회 다음날 아침에 동생 모데스트는 그의 형이 스코어를 앞에 두고 원기왕성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생동안 확신의 결여 때문에 괴로워했던 그는 죽음을 며칠 앞두고(물론 그 자신은 그것을 몰랐지만), 비로소 흔들림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옳았었다.

<비창>을 작곡할 때도 그것이 연주된 뒤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지극히 만족스럽고 즐거운 기분속에 있었다. 죽음에 관해 그는 이따금 농담을 하기조차 했다.

 

“이 들창코의 공포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다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우리를 잡아채가지는 않을 걸세, 나는 내가 아주 오래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라고 그는 비창의 작곡 당시 친구에게 써 보내기도 했다.
또한 비창 공연 직 후, 그는 유겐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간단히 묘사한 뒤,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우린 곧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오, 토요일엔 나는 모스크바에 가 있을 것이니까 말이요.”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에 돌아가기 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죽음을 맞았다.
“당장엔 잡아 채가지 않으리라던 죽음”이 그의 말을 비웃기도 하듯 당장에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은 강요된 자살이란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생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겐 허용된 정상적인 사랑과 행복을 그의 삶에서 가로막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그는 괴로워했고, 이 같은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했지만 그의 투쟁은 실패하였다. 그는 낡은 장갑을 던져버리듯이 쉽게 그러한 악습을 버릴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의지가 약했다.

“나는 나의 이같은 성향이 나의 행복에 가장 큰 장애라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내 본성과 싸워야만 해.....결혼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걸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다. 만약에 결혼할 만큼 충분히 용기가 없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나의 오래된 악습을 정복하고야 말겠더.”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결국 그의 투쟁은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종결을 본 셈이었다. 이리하여 차이코프스키는 위대한 희생자로 죽어갔던 것이다.

 

 

* 출처 - 음악가의 만년과 지음 (가람기획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