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포스트 카라얀' 시대의 베를린 필

凡石 2009. 4. 27. 21:41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포스트 카라얀' 시대의 베를린 필



지난 세기 성사된 베를린 필 전격 내한의 주역은 실상 베를린 필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수장이었던 카라얀이었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이들조차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그 이름은 베를린 필은 물론 고전음악 그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상임지휘자를 절대로 두지 않는 옹고집의 빈 필이 스스로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인 점과 달리, 베를린 필의 얼굴은 카라얀 이전에도 늘 카리스마 넘치는 상임지휘자가 대신했다.

1882년 54명의 단원들에 의해 자치단체로 출범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앞서 창단된 빈 필과 마찬가지로 '단원의, 단원에 의한, 단원을 위한' 민주적 악단이었다. 상임지휘자를 단원들의 비밀투표에 의해 선출하는 것은 물론 연주 레퍼토리까지 단원들이 발언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오케스트라의 정관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창단된 그 순간부터 이 정관은 1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초대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를 위시하여 아르투르 니키슈, 빌헬름 푸르트벵글 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이르기까지 베를린 필은 모두 투표가 아닌 총감독의 지명에 의해, 혹은 비상시국에 지휘봉을 넘겨받은 수장의 엄격한 독재와 카리스마 속에 통제되어 왔다.  이들은 하나 같이 종신제를 요구했으며, 때문에 베를린 필의 상임교체란 언제나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의 서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변화의 기점은 카라얀이 세종문화회관을 다녀간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비롯됐다. 카라얀의 사망으로 창단 이래 처음 상임지휘자 투표권이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쥐어지면서 1882년 작성된 오케스트라 정관은 1989년 10월 그 첫 기능을 발휘했다.

 제임스 레바인,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등 굵직한 거장들이 거론되는 와중에 비밀로 진행된 투표 결과 선출된 인물은 뜻밖에도 젊은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스스로도 놀랐다고 고백한 아바도는 지휘자의 독재에 좌지우지됐던 베를린 필의 분위기를 보다 부드럽고 민주적으로 바꿔 놓고자 시도했다. 단원들 또한 카라얀에 눌려있던 노회한 베를린 필에 아바도가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기를 고대했다. 휴머니스트 아바도는 실제로 그러한 약속을 전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그 중 일부는 실현되었다.

가장 눈에 띄게 두드러진 것은 세대교체였다. 무려 50여 명의 단원이 아바도 시대에 새롭게 영입됐으며 그 가운데에는 벤첼 푸크스(클라리넷), 엠마누엘 파후드(플루트),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등 현재 래틀 시대를 주도하는 정상급 수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12년 간 동행이 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신세대 단원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푸르트벵글러 이후 베를린 필이 지켜온 독일 고전과 낭만주의 전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불만이 구세대 단원들에 의해 대두된 것.

지휘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데 익숙해 있던 단원들은 아바도가 보장한 자율적인 분위기를 어색하게 받아들였고, 아바도는 자신의 악단에 남아있는 카라얀의 후광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뻔한 템포 하나를 놓고서도 30분 넘도록 단원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다수결로 결정하는 아바도의 늘어지는 리허설에 단원들은 급기야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민주적 운영과 더불어 아바도가 야심차게 들고 나온 차별 전략 중 하나인 동시대 작곡가들의 현대음악 소개 프로그램 또한 보수적인 베를린 필 단골 청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바도는 사면초가를 면치 못하는 듯 보였다. 아바도의 개혁정책에 제일 큰 방해물로 작용했던 인물은 지금은 퇴출당한 전임 감독 엘마 바인가르텐이었다.

보수파로 소문난 바인가르텐 감독은 아바도에게 현대음악 프로그램의 횟수를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젊은 단원들을 영입하고자 하는 아바도의 세대교체 정책을 대놓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기에 돈주머니를 잡고 있는 시정부의 정치적 간섭이 나날이 늘어가자, 아바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99년 베를린 필과의 더 이상 연장계약은 없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계기야 어떻건 '상임지휘자=종신제'의 공식을 당연하게 여기던 베를린 필 단원들은 아바도의 무욕에 놀라면서 일제히 아바도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아바도의 의지대로 바인가르텐은 쫓겨났고, 1999년 베를린 필 창단 사상 두 번째 투표가 이루어졌다.

 
예상보다 일찍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베를린 필은 이번에도 역시 예측 불허의 젊은 미래를 선택하였으니, 그가 바로 이번에 내한한 사이먼 래틀 경이다. 래틀을 선택한 베를린 필의 결정은 아바도 때에 비해서는 덜 충격적이었지만, 래틀은 아바도보다도 더욱 유연하고 자유분방한 아티스트이다.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에서 태어난 그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곱슬거리는 퍼머 머리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대중음악가 밥 딜런에 대한 애정의 표시다.

무엇보다 베를린 시와 대립했던 현대음악 레퍼토리에 관해서라면 래틀은 할 말이 더 많았다. 그가 열 다섯 살 때 리버풀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지휘자로 데뷔 한 작품은 다름 아닌 불레즈의 '주인없는 망치'였다. 버밍엄에서 무명의 시립 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아 19년 만에 세계 초일류의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킨 래틀은 베를린 필을 맡기 전부터 오케스트라를 둘러 싼 정치에 대해 이미 뼛속까지 통찰하고 있었다.

교향악단을 돌아보지 않던 버밍엄 시로 하여금 먼저 알아서 오케스트라 전용 공연장을 짓게 할 만큼 탁월한 수완을 래틀은 베를린 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단 상임지휘자로 선출된 래틀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TV 인터뷰를 통해 "베를린 필의 행보는 내가 결정한다. 역대 음악감독들도 그러한 벽을 극복하며 악단을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고, 강한 의지가 없다면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직을 감당해 낼 수 없다"며 시의 과도한 간섭을 배제시키겠다는 강도 높은 발언을 하고 나섰다. 래틀은 베를린 시와 계약하기 전에 먼저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와 시보조금 인상을 요구했다. 실상 재단법인화 또한 래틀의 작품이 아닌 전임 지휘자 아바도가 오케스트라의 독립을 위해 기틀을 닦은 법안이었다.

2002년부터 발효될 예정이었으나 시의회는 돈은 돈대로 퍼다 주면서 간섭은 할 수 없는 이 손해막심한 법안을 심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래틀은 초강경 입장을 고수했으며 최악의 경우 취임까지 거부하겠다는 배수진으로 맞섰다.  결국 바인가르텐의 후임으로 둘어온 오네조르크의 중재를 거쳐 2001년 6월 베를린 시의회는 오케스트라의 재단법인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베를린 필은 시의 보조금 외에 도이체방크를 메인 스폰서로 유치함으로써 가장 큰 문제였던 재정적 안정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2004-2005 시즌에 베를린 필하모닉은 88회의 연주회를 치렀으며 2005-2006 시즌에는 99회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래틀은 66회의 공연에서 지휘봉을 잡으며 이 연주회 중 절반은 해외에서 개최된다. 독일 고전과 낭만주의의 대표주자로 달리던 베를린 필은 이제 래틀의 장기인 라벨을 대단히 매끄럽게 연주할 정도로 래틀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들의 단련된 리듬감과 유연성은 이번 내한공연 프로그램 '어미 거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무엇보다 이번 시즌에서 주목되는 프로그램은 2006년 7월 엑상 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소개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다. 아바도가 위암까지 겪어가며 고생스럽게 다져놓은 민주화의 발판 위에서, 래틀과 베를린 필은 합리적이고 보다 세련되게 '포스트 카라얀' 시대를 개척하고 'Zukunft@BPhil'은> 있다. 'Zukunft@BPhil'은은 이전 베를린 필과 차별되는 특별한 교육 프로젝트로 주목받 아 마땅한 정책이다.

음악과 음악 교육을 보다 넓은 계층이 향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마련된 이 프로그램은 래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와 별도로 같은 비중을 두고 있는 사업이다. 카라얀의 아우라에 휩싸여 세계 위에 군림하던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서거와 함께 이제 지상으로 내려왔다.  오케스트라가 가진 자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사치스런 오르골이 아니라 진정 온 세상 사람들이 차별없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자산이며 수단임을, 리버풀 출신의 펑키 지휘자는 세계 최고의 악단과 더불어 한걸음씩 증명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