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자료]/전기, 전력 일반

송전과 배전

凡石 2009. 5. 6. 11:07

우리나라의 큰 발전소는 주로 남해안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된 전기는 송전(送電)과 배전(配電)시설을 통해서 먼 거리를 가야 한다.

 송전이라는 것은 최종 변전소까지 전기를 수송하는 과정이고 배전이란 최종 변전소에서 각 수요가에게 전기를 나누어주는 과정을 말한다.

전기라는 것은 먼 거리를 가다 보면 손실이 생기기 마련인데 1961년 당시에는 송전 및 배전 손실(이하 송배전 손실)이 29.35%나 됐다. 생산된 전기의 약 30%가 도중에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1961년의 발전용량이 36만 7천 KW였으니 이중 약 11만 KW의 발전소는 이러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 헛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만한 손실률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1994년 현재의 발전용량이 2,875만 KW이기 때문에― 844만 KW(2,875만 KW×29.35%)의 발전소가 송배전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다행히 그 동안 엄청난 투자와 노력을 한 결과 현재는 송배전 손실율이 5.59%로 감소됐다.

발전소를 수요지 근처에 건설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전소를 전기의 대량 수요지 근처에 건설하면 송전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에 송전 손실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선 수력발전소는 댐이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하며 화력발전소는 석탄 또는 석유공급이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화력발전소는 국산 석탄을 원료로 사용할 때에는 탄광 근처에 건설하게 되고 수입 석탄을 쓸 때에는 항구가 있는 곳에 입지를 정하게 된다. 특히 석유를 연료로 사용할 때에는 정유공장으로부터 파이프로 수송할 수 있는 곳이 적합하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는 방사능 문제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택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수요지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부득이 먼 거리를 송전해야 하는 처지이다.

 

전기 손실을 줄이려면 전선을 굵게 하든가 전압을 올려서 송전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전선을 무작정 굵게 할 수가 없으니 고압전기를 송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일제시대 남한에는 춘천, 청평 등 몇 개의 소규모 수력발전소와 석탄 산지인 영월(寧越), 삼척(三陟) 등에 화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이것만 갖고는 전기가 부족해서 북한에서 공급받아 썼다. 따라서 송전시설은 북쪽의 전기를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구조가 됐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송전용량은 작아졌다. 이때 15만 4천 V라는 초고압 송전시설이 설치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송전시설의 모체가 됐다. 이렇게 돼서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154KV(15만 4천 V : 특고압전기)라는 전압으로 장거리 송전하고 있었다(: 당시는 345KV 초고압 송전시설이 없을 때임). 154KV의 전기는 변전소에서 66KV(6만 6천 V)로 강하되어 수요지 근처에 송전된 다음 다시 22KV(2만 2천 V)로 강하되고 22KV의 전기는 또 다시 작은 변전소로 가서 3.3KV(3,300V)로 내려간다. 여기까지가 송전(送電)에 해당된다. 다음은 배전(配電)이 되는데 3.3KV의 전기는 전봇대에 매달린 변압기에 의해 100V가 되어 각 가정에 연결된다. 도합 4단계의 변압기를 거쳐 각 가정에 송전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정 때부터 1965년 당시까지 실시하고 있던 송배전 방식이었다<도표 1 참조>.

그런데 가장 합리적인 송전방식은 먼 거리는 154KV의 전압으로 송전하고 수요지 근처에 있는 변전소에서 22.9KV로 강하한 다음, 이 전기를 전봇대 위의 변압기에서 220V의 전기로 만들어 각 가정에 보내는 방법이다. 단 두 번의 변압기만을 거쳐 최종 수요처인 각 가정까지 가게 된다. 따라서 100V 송전하는 쪽과 220V 송전하는 방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전봇대에는 3천 3백 V짜리 변압기 대신 2만 2,900V짜리 변압기를 설치하는 것이다. 종래의 방식은 ① 154KV에서 66KV로 바꾸는 변전소, ② 66KV에서 22KV로 바꾸는 변전소, ③ 22KV에서 3,300V로 바꾸는 변전소 3개가 필요했는데, 새로운 방식에 의하면 154KV에서 22.9KV(2만2,900V)로 바꾸는 변전소 한 곳만 있으면 된다.

<도표 1>을 보면 송전은 완전히 154KV가 담당하게 됐으니 초고압 송전방식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배전도 3.3KV에서 22.9KV로 바뀌고 각 가정에서는 100V대신 220V를 사용하게 된다. 모두 기존 방식보다 고압전기를 쓰게 되니 송배전 손실률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정부나 한전에서는 이러한 송배전 구조로 개선키로 결정하고 뛰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고 힘든 일은 어떻게 말썽없이 100V의 전기 대신 220V의 전기를 각 가정에 보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220V전기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관념이 농후할 때였다.

 

일본은 아직도 100V의 전기를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서 220V로 승압하는데 성공했을까?

어떤 일이든 일단 일이 시작돼서 정착이 되면 이것을 다시 뜯어고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뜯어고치는 쪽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이 뻔히 나오는데도 이것을 시정할 때는 말썽도 생기고 장구한 시간도 필요하게 된다. 220V의 전기를 쓰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으로 유리하다는 것은 이미 이론적으로 결론이 난 사실이고 220V를 쓰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독자 여러분도 세계여행을 할 때 유럽을 위시해서 거의 모든 국가에서 220V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돌아왔을 것이다. 전 세계 176개 나라 중 165개 국가가 220V의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220V를 사용하는 가옥이 많으니 220V 사용국가에 속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100V나 110V를 쓰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정도 상세히 들여다보면 110V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방에서는 117V나 120V 쓰는 곳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127V 쓰는 곳까지 생겨났다. 여러분은 왜 합리적인 미국에서 전압(電壓)조차 통일되어 있지 않는가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간단하다. 실은 미국도 장차 220V로 통일시키겠다는 정책을 쓰고 있다. 장기계획을 수립해서 100V부터 조금씩 전압을 올려가고 있는 도중인 것이다. 예를 든다. 110V를 공급하고 있을 때 구입한 전기냉장고는 110V용일 것이다. 이 110V짜리 냉장고는 117V에서도 아무 이상 없이 가동되기 때문에 전기회사에서는 슬그머니 117V전기로 전환한다. 수용가는 110V의 전기 냉장고의 수명이 다되어 새 것을 구입하게 될 때에는 117V용 냉장고를 사게 될 것이다. 전기회사는 이 때쯤 전압을 다시 조금 올린다. 이런 식으로 언젠가는 220V로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미 전국의 전기가설을 100V로 해놓았으니 이것을 단번에 220V로 승압(昇壓)하자면 송전 및 배전시설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고 각 가정에서 쓰고 있는 전기기구를 몽땅 갈아 치워야 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장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하겠다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기시설을 100V로 가설한 후에 220V의 전기로 뜯어고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사업이다. 그렇다면 전기가 없는 지역에 새로 전기를 가설할 때에는 처음부터 220V의 전기를 공급하면 문제는 아주 간단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이미 설명한 대로 1965년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농어촌에는 거의 전기가설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220V의 전기공급사업을 위해서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상공부(당시 장관 박충훈, 전기국장 박용철(朴容澈)는 한전과 협의한 결과 농어촌 전화사업에서는 220V의 전기를 공급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실로 국가적인 위대한 용단이었다.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동기는 첫째, 1963년 4월에 ECAFE(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Far East : 아시아 및 극동지구 담당 UN 경제위원회) 및 EBASCO(미국인 기술고문단)에서 220V를 권장한 바 있었고, 둘째가 경비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재정상태가 빈약한 때라서 농어촌 전화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자금을 어떻게 출연하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러니 당연히 「적은 예산을 갖고 어떻게 하면 공사비를 싸게 해서 많은 농어촌 가구에 전기를 가설하느냐」라는 기술적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220V로 결정이 난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송배전 능력이 증가된다. 수도 파이프에서 수압(水壓)이 배가 되면 나오는 물의 양도 배가 된다. 전기에 있어서도 전기공급량은 전압(電壓)에 정비례한다. 예를 들어 3,300V로 공급하던 전선에 2만 2,900V의 전기를 공급하면 약 7배(2만 2,900V ÷ 3,300V = 6.94)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100V의 가정용 전기를 220V로 승압하면 2.2배의 전기공급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송전용 철탑 및 배전용 전봇대의 경비가 대폭 줄어든다. 당시 계산에 의하면 가공선(架空線)의 경우 공사비가 16%, 지중선(地中線)은 무려 34%가 절감된다고 나왔다.

필자는 이 글의 초안을 쓸 때(1994), 승압사업 당시 한전의 기술이사였던 김종주(金鐘珠) 씨(후에 한전 부사장,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 효성중공업 부사장, 한국중공업 부사장, 무디코리아 회장 역임)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업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국가적 정책사업이었습니다. 초기에 한전으로서는 굉장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투자가 많이 소요되는 반면, 농어촌의 수요가 적으니 한전으로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었습니다. 한전은 어떻게 하면 공사비를 줄일 수 있을까 하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때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짜낸 방법이 220V 승압이었습니다. 유럽을 보고 온 사람들의 공통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수요지 근처에 있는 전봇대 변압기까지는 3,300V로 송전이 되고 있었는데, 3,300V를 그대로 쓴다면 수요가 늘어나서 몇 해 안 가서 전선을 굵은 것으로 갈아 끼우던가, 회선 수를 늘여야 된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추가 공사비가 들어가게 된다는 결론이지요. 그래서 3,300V 송전방식을 2만 2천 V로 바꾸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도 100V대신 220V로 가설하자는 안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전선을 바꿀 필요 없이 10배 이상의 전기를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220V로 송전하고 있는데 유독 미국과 일본만이 100V로 공급되고 있는 것은 100V의 전기를 220V로 바꾸는 시기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불평이 두려워서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은 전기의 주파수조차 통일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서쪽은 50싸이클이고, 동쪽은 60싸이클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전기시계를 사도 도쿄에서는 한 시간에 60분이 가고, 오사카에서는 50분만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농어촌의 전화율이 기껏 10% 정도였기 때문에 농어촌 전화사업을 할 때 220V로 해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도 일본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한국에서는 220V 송전방식이 정착되고 있는데 대해 아주 부러워합니다."

당시 상공부 전력과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담당했던 손태염(孫泰炎) 씨(상공부 농어촌 전력과장, 대한엔지니어링(주) 사장)의 증언도 들어본다.

"1965년도 농어촌 전화사업은 처음에는 100V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220V 승압도 농어촌 전화사업 추진 때 함께 해버리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한전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계획을 세워가지고 당시 상공장관(박충훈)의 결재를 받고 대통령에게도 보고를 했습니다. 당시는 아직 220V를 사용하는 전기 기구도 국내에서는 만들지 않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농어촌 전기의 사용 목적은 주로 조명이기 때문에 우선 220V용 전구부터 긴급 제작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가의 불편이 나올까 봐서 220V를 100V로 내리는 「트랜스」(Transformer)를 무료로 공급키로 했습니다. 전구는 220V를 쓰고 라디오나 선풍기는 100V짜리를 쓸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불평이 나올까 봐서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도회지 사람은 100V를 쓰는데 시골 사람은 멸시 당하기 때문에 220V를 쓰게 됐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파동은 걷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홍보책자도 많이 만들어 보급했고, 지방 공무원에 대한 교육도 시켰습니다. 한전의 지방사무소에서도 발벗고 나섰어요. 그러나 이런 조치만으로는 걱정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대통령의 생가부터 220V로 전기 가설을 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대통령 생가도 220V로 했으니 모두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선산(善山)에 있는 대통령 생가에는 대통령의 백형(佰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 설명없이 220V로 가설해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220V 전기가 가설된 집은 선산에 있는 대통령 생가가 되었습니다."

손태염 씨의 회고는 계속된다.

"대통령 생가도 220V로 가설했다는 소문을 슬그머니 흘렸어요. 지방 관리들도 이 사실을 잘 활용하더구만요. 시간이 흐르자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서 220V의 전기를 가설했다는 소문으로 변했습니다. 작전은 들어맞은 것 같이 느껴지더구만요. 그 후 아무 탈 없이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하루는 아침 출근하자마자 이낙선(李洛善) 장관이 부르는 겁니다. 장관실에 가니 "오늘 아침 신문을 보았느냐?"고 물으면서 신문을 내보이는 겁니다. 그 신문에는 220V 승압정책에 대한 심한 공격적 기사가 대문짝만큼 크게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TV가 펑크났다', '가전기기가 못쓰게 되었다', '국가적 손실이다', 심지어 '나라망치는 정책이다'라고까지 나와 있었어요. 장관은 '말썽이 많으니 중지하면 어때' 라고 했습니다. 장관은 부임 초가 되어서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해 상세히 설명을 했어요. 그랬더니 장관은 ?하기는 해야 되겠구만, 그러나 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좋겠어? 라고 하더구만요. 그러나 농어촌 전화사업을 진행하면서 어떤 동네는 100V, 어떤 동네는 220V로 구분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검토해 보겠습니다' 라고만 대답하고는 어떤 경위로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되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기자실로 가서 잘 아는 기자에게 물어보니 화곡동에 거주하는 기자들일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화곡동은 새로 건설되고 있는 주택지구였습니다. 그래서 한전은 처음부터 220V로 가설해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농어촌사업의 일부였지요. 처음부터 화곡동에 입주한 사람들은 220V가 불편은 하지만 그런대로 참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3년 후에 신문기자들이 하나 둘씩 화곡동으로 이사를 가서 몇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기자들은 지금까지 쓰던 100V짜리 가전기기를 갖고 이사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화곡동에서는 이들 가전기기를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한전에서 공짜로 준 「트랜스」도 전 입주자가 이사갈 때 몽땅 갖고 갔으니, 이들 기자들은 화가 나서 기사를 썼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전에선 신문사에 항의를 했으며, 결국 신문사에서 사과문을 내고 이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220V 전기가설은 농어촌 전화사업 분야에 있어서는 별 문제없이 진행됐다. 당시 농어촌에서는 전기만 끌어주면 고마워했고, 동네 전체가 220V를 사용하니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생활수준이 올라가서 농어촌에서도 전기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220V용 전기기구의 생산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220V 전용 전기기구 수요량은 생산업체로서는 경제적 생산단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100V와 220V 겸용 전기기구 제조를 강력히 권장했다.

1973년 12월, 한전에서는 TV외 3개 품목에 대한 110/220V 겸용 및 220V 전용기기에 대한 개발비를 보상키로 하는 조건으로 생산토록 했으며 동시에 전기다리미 외 24종의 110/220V 겸용 기구에 대한 KS규격을 제정했으며 그 후 품종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110/220V 겸용기기 개발에는 기술적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한 예로 100V를 쓰는 것보다 220V를 사용할 때는 전선은 가늘어도 되나 인체에 대한 안전상 전선 피복은 두껍게 해야 한다. 그러니 100/220V 겸용일 때에도 전선이 굵어야 하고 전선 피복도 두껍게 해야 한다. 구조도 좀 복잡해지고 부품도 더 들게 된다. 그래서 겸용형은 값이 2∼3% 비싸게 된다.

전기효율 면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가정용 전기기구, 특히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전기를 많이 쓰는 기구는 겸용보다 220V 전용이 전기 효율상 유리하다. 따라서 220V 전용을 사용하는 쪽이 전기 소비도 줄어들고 전기료도 싸지게 된다. 결국 겸용이라는 것은 100V를 쓰는 도시 사람에게는 전기기구 값을 2∼3% 비싸게 사는 부담을 안겨주고 220V가 가설된 농어촌에서는 220V 전용기구를 못쓰게 함으로써 전기기구 값을 좀 더 비싸게 사는 것은 물론이고 전기료도 좀 더 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겸용이란 과도기적 조치일 뿐이고, 하루 속히 220V 전용기기 생산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상은 농어촌 전화사업으로 새로 전기를 가설할 때의 경우이다. 다음은 이미 전기가 가설돼서 100V의 전기를 쓰고 있는 지역, 특히 도시지구인데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220V로 승압하는 사업은 국가적으로 이익이 크지만 수요자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우선 그 이점을 살펴본다.

① 전기공급 능력이 확대된다 : 국민소득이 증가되면 문화수준도 향상된다. 문화수준이 향상된다는 것은 전기를 많이 쓴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평균적으로 각 가정에는 2m/m의 전선이 가설되어 있다. 2m/m 전선으로는 4KW가 한도이다. 그러니 4KW 이상을 쓰자면 옥내 배선을 전부 교체하는 큰 공사를 해야 한다. 벽을 뜯어야 되는 경우도 있다. 도저히 공사를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럴 경우에는 220V로 승압하는 쪽이 문제 해결이 간단하다. 220V로 승압하면 전선을 바꾸지 않고도 10KW까지는 사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② 전기의 질도 좋아진다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00V 방식에서는 네 번 변압기를 통한다. 중간에 있는 변전소나 변압기에서 갑자기 수요변동이 생기면 각 가정의 전압은 즉시 영향을 받게 된다. 중간에 변압기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경향이 크다. 그런데 220V 방식에서는 154KV의 초고압 전기가 수요지 근처까지 와서 22.9KV로 강하된 후 집 근처 전봇대까지 바로 오게 된다. 그러니 전압변동이 적다. 만일 전압이 10V 떨어졌다고 가정한다 해도 220V 전기는 210V로 되어 거의 지장이 생기지 않지만 100V의 전기가 10V 떨어진다면 90V가 되어 가전기기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전압이 초저녁과 심야 사이에 20V의 차이까지도 난다고 한다. 초저녁에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저녁에 100V였던 지역에서는 심야에는 120V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전구가 자주 끊어지는 경우가 일어나게 된다. 220V가 되면 이런 문제는 대폭 개선될 수 있다. 즉 양질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③ 전기손실이 줄어들어 전기요금이 싸진다 : 가령 어떤 가정에서 시간당 2.6KW의 전기를 쓴다고 할 때 이 집에서 생기는 평균 전기손실은 연 87KWh가 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전기가 전선을 통과할 때 열로 변해서 없어지는 양이다. 이것을 220V로 승압해서 쓰면 ―전기를 2.6KW의 배인 5.2KW를 써도― 전기손실은 대폭 줄어들어 연간 22KWh가 된다. 즉 전기손실이 1/4로 줄어든다는 결론이다. 전기를 많이 쓰게 되면 손실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럴 바에는 220V로 승압하는 쪽이 전기손실도 줄어들고 전기요금도 싸질 수 있다.

 

220V 승압 전국 확대방침은 배전방식 개선위원회에서 결의한 안을 상공부에서 승인함으로써 확정됐다(1971년 5월).

한전에서는 우선 시험적으로 강원도 명주군과 삼척군의 기설 100V 수용가에 대해서 220V로 승압사업을 실시했는데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 후 농어촌 여러 곳에 시공을 했으나 100V용 전기기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는 손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78년쯤 국산화된 110/220V 겸용 전기기기가 종류도 많아지고 생산량도 늘어나자 정부(동력자원부)는 단기 5개년 승압계획(1978∼82)을 마련하고 이들 동년 5월에 공포했다.

그러나 승압계획에 대해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크게 반발했다. 진정도 많이 들어왔다. 그 때 나는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수석비서관 회의 때 김정렴(金正濂) 실장이 "220V 승압문제로 불평이 대단한 것 같은데 무슨 묘안이 없소?"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6 · 25 사변 때 나는 미 공군이 주둔하던 진해공군기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기지에는 전깃줄이 세 가닥 들어와 있었습니다. 세 개의 전선 중 중간선과 다른 선을 연결하면 110V가 되고, 중간선을 쓰지 않고 바깥줄 둘을 연결하면 220V가 됩니다. 그래서 미군들은 110V도 쓰고 220V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당분간 그런 식의 과도적 단계를 두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과도적 단계에서는 우선 100V 전용기기의 생산은 중단하고 110/220V 겸용형 기기만 생산해야 합니다<도표 2 참조>. 수요가들은 110V와 220V의 전기가 모두 공급되니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100V 전용기기를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으나 새로 구입하는 것은 110/220V 겸용기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미 보유하고 있던 100V 전용기기는 수명을 다해 차차로 수가 줄어들어 주로 110/220V 겸용기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약 5∼6년의 기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이 때쯤에는 110/220V 겸용기기의 생산도 중단하고 220V 전용기기만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0V 전용기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가 되면 110V 배전선은 끊어버리고 220V만 남겨 놓으면 자연히 220V 승압계획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10년 후에는 무리없이 승압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전측에 알아보니 "한전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한전은 변압기부터 바꿔야 하고 전선이 두 줄 대신 세 줄 들어가니 귀찮고 부담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 110V와 220V 두 종류의 전기가 각 가정에 공급되는 방식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새로 건설하는 아파트 단지부터 착수했다.

1978년 9월부터는 100V 전용 가전기기는 단계적으로 생산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1985년 현재의 국내 생산실적을 보면, 조사된 주요 가전업체 총 47개 사가 54개 품목에 걸쳐 1,066만 대를 생산했는데, 이 중에서 100V 전용기기는 4.1%인 44만 대로 100V 전용기기의 생산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100V 전용기기는 전기주전자 등 대부분 영세업자가 생산하는 제품과 인체에 직접 접촉하여 사용하는 전기장판, 담요 등뿐이다. 겸용기기는 94.9%인 1,011만 대이고 220V 전용기기는 1.0%인 11만 대밖에 안 된다. 이 때가 110/220V 겸용 생산 전성기 시절이다. 1992년 1월부터는 110V와 220V의 양 전압 전력 공급이 폐지되기 시작했고, 동년 9월부터는 (8단계에 걸쳐 단계별로) 110/220V 겸용기기 생산 및 수입을 금지시켜 오고 있다.

 

 

1994년 말 현재 전국의 총 전기 수요가(需要家) 1,149만 1천 호 중 1,021만 5천 호의 승압이 완료되어 승압률은 88.9%이다.

미()승압호수는 127만 6천 호인데 이를 행정단위별로 분석하면 전국 136개 군()지역 모두와 68개 시() 중 38개 시의 승압이 완료되었다. 시단위 지역의 승압은 9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96년 말에 완료예정이고 광역시는 97년, 서울시는 98년에 승압을 완료할 계획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220V 전용기기만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100V의 전기만 가설된 가정에서는 승압용 「트랜스」(변압기)를 따로 구입해야 한다. 과거 농어촌 전화사업을 추진할 때에는 농가에서 220V를 100V로 내리는 트랜스를 구입해야 했는데 현재는 거꾸로 도시 사람이 100V를 220V로 올리는 트랜스를 사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은 됐지만 전기수요는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송전용량도 적었고 전국적인 송전망도 구성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6 · 25 한국전쟁으로 이런 시설마저 파괴돼서 종전 후 50년 말까지는 이의 복구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전기손실량은 1961년 현재 29.35%나 됐던 것이다. 이 중 송전과정에서 발생하는 송전손실과 변전(變電)손실이 합쳐서 10.68%, 배전손실이 18.8%였다. 정부나 한전에서는 이를 감소시키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노후화되고 턱없이 부족한 배전설비를 개선하는 문제였다. 노후화된 선로는 새것으로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 더욱이 당시는 정전사고가 많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 중 50%는 주상변압기가 과열되어 터지는 사고였다. 그래서 주상변압기 교체작업을 서둘렀다.

<도표 3>에서 보듯 1차 배선 전압을 3.3KV(3,300V)에서 22.9KV(2만2,900V)로, 2차 배전선을 100V에서 220V로 승압함으로써 전선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대폭 감소시켰다. 그리고 구식 전주변압기(3.3KV→100V용)를 신형변압기(22.9V→220V)로 교체함으로서 변압기 손실도 줄였다.

22.9KV 배전선도 1967년도부터 구리()선 대신 알루미늄전선을 쓰기 시작했다. 구리()는 알루미늄보다 60% 정도 전기를 잘 전달하는 대신 3.3배나 무겁다. 똑같은 중량으로 따지면 알루미늄이 약 2배 정도 전기를 잘 전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루미늄이 값도 싸다. 똑같은 비용으로 굵은 알루미늄 전선을 쓰면 전기손실이 적어진다. 알루미늄 전선이란 중심부는 인장력에 견디기 위해 강철선으로 되어 있고 외부만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다.

당시는 도전(盜電)량도 많았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일정시대부터 내려오던 정액등(定額燈)이란 판매방식이 남아 있었는데 전기를 적게 쓰는 가옥에 대해서는 계량기는 달지 않고 전등 하나에 얼마씩을 받았다. 만일 30W 전구를 기준으로 해서 전기 요금을 내고는 60W를 쓴다던가 전기 다리미를 사용하면 도전(盜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래서 정액등 제도를 없애는 동시에 계량기를 달아 주었으며 도전방지공사도 실시했다.

나무로 된 전주(電柱)도 콘크리트 전주로 바꾸기 시작했다. 나무전주는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었는데 길이가 10m나 되어 값이 비쌌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콘크리트 전주를 국산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콘크리트 전주가 상식화되어 있는데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콘크리트 전주는 잘 부러진다고 생각했고 만일 중간에서 부러지면 큰 사고가 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생산공장을 시찰키로 했다. 필자도 상공부 동료와 함께 갔는데 고려대학교 옆에 있는 중앙산업(中央産業)이었다.

제작과정은 길이 15m나 되는 철판으로 된 형틀(金型)에 전주 모양으로 만든 철근 구조물을 넣고 여기에다 콘크리트를 넣은 다음 상하(上下) 형틀을 결합하고 이 형틀을 기계에 부착하고는 굉장한 속도로 회전시켰다. 이때 콘크리트는 원심력에 의해서 조밀하게 다져지면서 중심부에는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즉 파이프 모양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물을 공급해가며 며칠을 숙성시킨 것이 콘크리트 전주였다. 이 때 약 15m 가량의 전주를 검사하는 장면도 목격했는데 전주를 수평으로 한 다음 밑둥을 고정시키고 다른 끝부분에다 엄청난 중량을 가했는데 전주가 1m나 휘었는데도 전주는 부러지지 않았다. 콘크리트가 가공만 잘하면 이렇게까지 탄력성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모두들 콘크리트 전주를 신뢰하게 됐다. 콘크리트 전주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무 전주보다 높아져서 비오는 날 가로수에 의한 누전도 줄어들게 됐다. 그리고 전주간의 거리도 50m에서 70m로 늘일 수 있었다.

애자(碍子: 도자기로 된 절연물)도 문제가 컸다. 국산 애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절연성이 나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전이 심한 것부터 질이 좋은 것으로 교체했다(: 초고압용 애자는 아직까지도 국산화를 못하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니 배전손실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1961년에 18.17%였던 것이 5년 후인 1966년도에는 7.40%로 대폭 감소했고, 1981년도에 가서는 2.71%로 국제수준이 됐다. <도표 3>와 같다.

 

<도표 4>에서 보듯이 송전선은 154KV(15만 4천 V)로 단일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154KV 송전시설 공사가 착수됐다.

154KV 송전시설을 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완비된 후에는 66KV 송전선이나 22KV 송전선은 없어지게 된다.

다만 공장 등 대()수요가에게는 변전소에서 공장까지 전용선을 가설해서 공급하게 된다. 대규모 공장에서는 154KV를 바로 쓰고, 보통 공장은 66KV, 소규모 공장은 22.9KV를 쓴다. 공장 근처에 154KV 송전선이 통과하면 송전탑에다 무인변압기를 설치해서 필요한 전기를 끌어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각 전압별 회선긍장(回線亘長: 送電回線×거리)은 <도표 4>과 같이 154KV는 급격히 늘고 66KV는 차차로 줄어들고 있다. 22KV 송전시설은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없어지고 그 대신 공장에서는 22.9KV 배전선으로 전기를 공급받게 됐다.

 

60년대에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발전량은 급격히 늘어갔다.

<도표 5>을 보면 1961년의 발전설비 용량을 100으로 볼 때, 1965년에는 배가 되는 209, 1972년도에는 10배가 되는 1,054, 1979년에는 2,187이라는 어마어마한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18년 만에 22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발전량이 늘어가니 송변전 설비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전기를 만들어 보았자 쓸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어 송배전시설 확충사업은 제1차 5개년계획 때부터 국가 최중점사업에 포함되었다.

60년대에는 기존 송변전시설을 보수하고 154KV 송전방식으로 확충해 가면서 아쉬운 대로 송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발전량이 자꾸만 늘어가니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국 기존 송전시스템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1970년이 되면서 새로운 송변전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154KV 송전방식보다 더 효율이 좋은 방식을 택하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다. 당시 고려대상이 된 전압은 스웨덴의 380KV, 일본의 275KV(500KV 계획 중), 미국의 345KV(일부지역은 700KV)였다.

여러 번의 토의가 있은 후 345KV방식이 채택되었다. 당시 한전의 송변전 부장이었던 김갑현(金甲鉉) 씨의 증언을 들어본다.

"우리나라는 일본, 미국, 스웨덴 등과 비교해서 국토의 길이가 짧고 또한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가 많습니다. 그러니 수력발전소와 달리 발전소 위치를 비교적 자유롭게 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거리 송전을 할 필요가 없으니 송전량 및 건설비 등을 고려해서 345KV 방식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당시 사용하고 있던 154KV를 배로 증가시키는 것이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됐고, 미국에서 345KV 방식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방식으로 택하는 것이 미국쪽을 설득하거나 차관을 얻어올 때 유리할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한전의 기술이사였던 김종주 씨도 345KV 방식에 찬성했다.

"나는 1959년에 스웨덴에 시찰 간 경험이 있습니다. 스웨덴 국토는 남북으로 길게 생겼는데 전기는 주로 북쪽에 있는 대규모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되고, 소비는 주로 수도(스톡홀롬)를 중심으로 한 남쪽에서 사용되는 나라입니다. 발전소와 소비지의 거리가 500∼600km나 되는데, 380KV의 전압으로 송전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600km나 되는 장거리를 「산림이 우거진 산악지대 위로」 송전탑이 끝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장관이라고 느꼈습니다. 당시(1970) 스웨덴의 발전설비는 1,500만 KW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우리나라가 약 250만 KW이니 6배 가량 많은 발전설비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345KV를 택해도 ―스웨덴은 380KV― 우리나라로서는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1차 사업은 1971∼75년까지 5년에 걸쳐 실시되었다. 공사량은 총 652(C-km)인데, 서울·대전 간 184(C-km), 대전·울산 간 208(C-km), 대전·여수 간 208(C-km), 기타 52(C-km) 등이었다. 즉 대전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서울, 동쪽으로 울산, 서쪽으로 여수로 Y자형이 된다. 꼭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345KV 송전선을 「전기 고속도로」라고 불렀다. 외자 2,425만 달러, 내자 166억 원이 소요되는 대공사였다. 이 때 필자는 광공전차관보로 있었는데, 남아 있는 당시의 수첩을 보니 <도표 6>와 같은 비교표가 있어 소개한다.

이 도표를 보면 송전능력에 큰 변화가 있다. 154KV는 회선당 10만 KW를 송전할 수 있는데, 345KV 방식으로 하면 한 회선으로 4배인 40만 KW를 송전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345KV 때는 전선을 한 가닥 줄로 끌지 않고 복도체(復導體)라고 해서 두 줄을 한 세트로 조립한 것을 사용했다.

영어 알파벳의 I자 모양인데 위 끝과 아래 끝에 각기 전선이 하나씩 있다. 전선을 굵게 하지 않고 복도체를 사용한 이유는 전압 강하가 1/8로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4도체(導體)라고 해서 X자 모양으로 되었는데, X자의 각 끝에 전선이 4개 있다. 송전량도 늘지만 전압강하가 무시할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초창기에는 I자 모양의 복도체를 사용했는데 이 복도체 2회선을 설치했다. 이유는 전기를 송전하려면 전선이 3개가 필요한데, 한 전주에 3개의 전선을 끄는 것보다는 6개의 전선을 끄는 것이 철탑에 안정성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80만 KW 내지 100만 KW를 송전할 수 있는 송전시설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복도체를 X형으로 바꾸면 200만 KW의 송전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이상의 전기송전이 필요하게 되면 회선 수를 늘리면 되고 345KV 송전방식을 700KV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것이 345KV 송전방식을 채택할 때의 구상이었다. 당시의 상공부 손태염 과장의 회고를 들어본다.

"이 사업 추진 초기 이야기입니다. 현대건설에서는 Cogelex사와 Siemens사에 변압기 및 철탑에 대한 오퍼(Offer)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현대에서는 설치공사만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Cogelex사의 가격은 2,598만 6천 달러인데 비해 Siemens사는 4,197만 1천 달러로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나서 Cogelex사와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Siemens사는 Eisenberg사와 제휴하고는 현대건설과 치열한 경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전에서는 1970년 2월 현대와 가계약(Letter of Intent)을 했습니다. 철탑은 완제품을 수입해다 조립만 하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럴 때 대통령이 발전소 건설현장을 시찰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전은 투자비가 몹시 부족해서 거의 모든 것을 차관으로 수입해 발전소를 지을 때입니다. 이 시찰 때 "그래 한전은 발전소를 건설할 때 「사다리」까지 수입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이제는 공업이 제법 발달했는데 한전도 앞장서서 국산품을 쓰도록 해!" 라는 대통령의 기합이 떨어졌습니다. 한전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345KV 사업도 철탑제조용 소재만 수입하는 것으로 사업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이 사실은 1970년 11월 1일 현대에 통고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외국업자도 완제품 공급의사를 포기하고, 소재 공급의사를 통고해 왔습니다(1970년 11월 25일). 그 후에도 가격이 비싸다고 옥신각신이 있어 1971년 8월 4일에야 외자도입심의회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1976년 10월에 ()여주∼()옥천 간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345KV 초고압 송전선이 개통되었습니다. 이 사업, 즉 제1차 사업은 1977년 4월에 완공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지역간 전력융통 능력에 획기적인 개선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쯤에는 송전탑 제조용 각종 철강재도 국산화되고 기술도 향상되었다. 그래서 1973년도에 석유파동이 나자 중동 및 동남아에 진출해서 송전탑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원기계공업기지에서 154KV 및 354KV 대형 변압기가 국산화됨에 따라 그 후의 공사는 순전히 우리 힘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됐다. 1978년부터는 제2차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이 사업은 계속적으로 확장되어 갔다. 1985년에는 전국적인 환상망(環狀網)이 구성되었다. 환상망이라는 것은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전기공급계통이 두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한쪽 송전선이 고장나도 다른 송전선을 통해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송전방식은 345KV 초특고압과 154KV 특고압으로 단순화됐다.

그 결과 전력손실률은 1961년도의 11.18%에서 80년부터는 4% 이하로 떨어졌고 94년도 현재는 3.16%로 감소하였다. 배전손실율까지 합하면 1977년에는 9.29%, 79년 7.50%, 1980년 6.69%로서 이 수치를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도표 7 참조>

우리나라는 70년대 말에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발전소를 어느 곳에 건설하든 간에 송전설비는 완비된 상태이다. 345KV나 154KV의 송전이 환상선(LOOP화)이 되어 한 선로에 사고가 나더라도 송전이 가능하다. 전압강하가 거의 없는 국제수준으로 개선되었다. 송배전시스템을 현대화함으로써 투자비를 대폭 감축시킬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문화국답게 충분한 전기를 쓰고 있다. 전기없이는 가정생활도 원활히 할 수 없고 공장도 못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3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다. 이러한 일이 얼마나 큰 역사(役事)였는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가지 예를 든다. 「우리나라에 깔려 있는 송배전선의 길이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정확한 답은 94년 현재 8억 7천만m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약 2,200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