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자료]/전기, 전력 일반

전기의 역사

凡石 2009. 5. 6. 11:13

1. 궁궐에서 밝혀진 첫 전기불

 

지금으로부터 110년전인 1887년의 3월 초순, 구경 좋아하는 한성(漢城)의 사내들은 지금의 고격동인 관화방으로 몰려들었다. 궁궐에 켜졌다는 '물불'을 보려고 밀어닥친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의 못물을 먹고 켜진 불이 건청궁 처마 밑에 벌겋게 켜졌다 해서 '물불'이라고 이름지어졌고, 그것은 또한 묘한 불이라는 뜻으로 '묘화(妙火)'또한 와전되어 '모화'라고도 불리워 졌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켜진 최초의 전기불이다.

 

이문명의 불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 땅에 들어왔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언함에 따라 집정 10년만에 대원군이 정치에서 손을 떼면서 우리나라는 마침내 개화의 바람이 곳곳에서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외세의 강한 압력이 더해져 드디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세계 열강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가운데 미국과도 1882년 5월22일 한미통상협정을 맺게 되었다.

 

한미통상협정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은 초대 주한 공사로 후트(Lucius H. Foote)를 임명, 서울에 부임했으며 우리나라도 같은 해 8월 민영익, 홍영식 등을 사절단으로 미국에 보냈다.

 

미국에 머물면서 새로운 문명의 세계를 접하고 놀라운 과학용품을 살펴 본 이들 사절단은 돌아와 고종(高宗)에게 발전소 건설을 건의, 마침내 에디슨 전등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884년 9월에는 미국에서도 발명된지 얼마 안되는 전등을 궁궐에 설치하기 위해 발전시설과 전등 일체를 발주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국내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그 도입이 다소 늦어졌다가, 1886년 말경 에디슨 전등 회사가 전기기사 윌미엄 멕케이(William Mackay)를 파견하면서 본격적인 설치 공사에 들어가 3월 초 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 점등에 사용된 발전기는 건청궁 앞 향원정에 놓인 다리와 우물 중간지점에 있었으며, 향원정 연못에서 취수, 석탄연료의 증기동력으로 운전되었다.

 

궁내의 너른 대청과 마당에는 커다란 등롱 같은 것이 달여 있고 서양 사람이 기계를 조절하면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면서 못물을 빨아올렸으며, 한쪽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뜨거운 물이 못으로 흘러나오곤 했다. 이러길 한참하면 그 등롱 같은 데 환한 불이 켜지므로 사람들은 넋을 잃고 뛰쳐나와 야름을 이용하여 숨어서 바라보았다.

 

지금 같으면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전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그 때에는 전혀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라 괴물이라 하여 각 별궁에서까지도 온갖 구실을 붙여 이 본궁의 괴물을 구경하러 오곤 하였다.

 

그 때는 아무도 그것을 전등이라 부르지 않았으며 그냥 '괴물'로만 통하였고, 이것이 켜져 있는 동안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려와 짜증을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고장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전기가 나가므로 행등이나 촛대는 없애지 않고 상비해 놓고 그대로 사용했다.

 

한 번 고장이 나면 고치는데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던지 '건달불'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렇게 밝혀진 전등은 도둑이 밤에 난동을 부리니 황제께서 전등을 켜서 궁궐내를 밝히도록 명령하셨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후 사용폭이 점차 넓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1899년 5월 4일 첫 전차 운행 이후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거리조명용 첫 민간전등이, 그리고 1901년 8월 17일 진고개 일본인상가 주택가에 600등의 첫 영업용 전등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전기사업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지만 전등은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기불은 대국의 것이 아니라 오랑캐의 것이기 때문에 전등 아래서는 제사를 모셔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았다. 또 전기불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는 몇 달 동안 매일같이 여남은 집씩 정전이 되어 애를 먹었다. 그 이유는 노인들이 담배를 피려고 꼬지를 전구에 대어 붙이려다 불이 붙지 않자 전구를 빼고 소켓에다 담배 꼭지를 꽂다보면 퓨즈가 나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2년쯤 계몽한 후에야 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2. 전기회사가 처음 설립되다

 

경복궁에 전등이 켜진지 11년 뒤인 1898년 고종은 1월 18일자로 당시 한성판윤 이채연으로 하여금 이근배, 김두승 등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서울시내의 전차, 전기, 전화의 가설과 운영권을 농상공부대신에게 청원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월 26일자로 인가를 받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이채연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한성전기회사는 그 해 10월 17일 서대문~홍릉(청량리)간의 단선궤도 부설과 전선로의 가설공사를 기고, 두달 후인 12월 25일에 완공하는 한편 동대문(현 동대문종합시장)에 75kW 직류발전기 1대의 기력발전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보통 객차 10대와 황실전용 전차 1대를 조립하여 당초 1899년 5월 1일 시승 및 개통식을 가질 예정으로 각계 인사까지 초청하였으나 발전소측의 미비로 5월 3일 하오 3시로 연기했다.

 

이 날에는 정부의 고관을 초대하는 한편 시민들이 전차에 몰려들 것에 대비하여 병정 300명과 순검 250명까지 동원하였으나 역시 발전설비의 사고 때문에 운행하는데 성공했다.

 

전차가 운행되자 서울시민들의 놀라움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장안의 남녀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전차를 따라 동서로 정신없이 치달아 동원된 군대와 경찰이 진땀을 뺐다고 당시의 황성신문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시운전에 성공한 전차는 다시 여러 차례의 시험을 거친 다음 5월 20일부터 일반에게 공개운행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 대중교통의 새로운 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이 전차는 처음에는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를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행하였다.

 

초기에 전차에는 상등칸과 하등칸의 구별이 있었고, 요금도 달라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상등은 엽전 다섯돈, 하등은 서돈이었다. 전차의 앞뒤로 창문이 없는 칸이 하등이었고, 중앙의 창문이 있는 칸이 상등이었다.

 

처음에는 전차의 일정한 정거장이 없어 승차할 사람은 선로의 골목길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전차가 오면 손을 들어서 탔고, 내릴 승객은 미리 운전사나 차장에게 말하여 편리한 곳에서 하차할 수 있게 했다.

 

전차의 내부에는 남녀의 좌석이 각각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관습으로 미루어볼 때 자연발생적으로 자리를 따로 하였을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가 있다.

 

전차에 대한 인기가 높자 한성전기는 단체 관광용 전차도 운행하였으며, 그해 12월 21일에는 용산, 즉 지금의 원효로까지 선로(첫 선로는 서울역 뒷편의 서계동과 청파동으로 연결)를 연장하여 개통하고 화물전용전차를 운행했다.

 

원효로는 당시 용산이라고 하였는데, 이 곳에는 경인철도가 개통하기 전에는 물론이고 구 뒤에도 전국 제1의 강항(江港)이 있어 한강 상류와 하류에서 각처의 농,임,해산물 등이 집산하는 서울의 출입구였다. 모여드는 이들 화물을 운송하는 수단으로 화물열차를 운행해 큰 재미를 본 것이다.

 

전차의 궤도는 지난 60년대까지 있었던처럼 거리의 중앙이 아닌 보도쪽에 부설되었다. 그리고 시내의 4대문 좌우에는 성벽이 있기 때문에 전차는 남대문과 동대문의 누문 안을 동행하였다. 특히 남대문은 원래 사람과 말의 교통량이 폭주했던 곳인 데 그 좁은 문안에 전차가 달리고, 1905년부터는 경부철도가 개통되어 많은 철도승객까지 남대문을 통하여 입성하였으므로 큰 혼잡을 이루었다.

 

그래서 1907년에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와 군부의 대신으로 성벽처리위원회를 구성, 남대문 바로 서납쪽에 있던 남지(南池)를 메우고 대문은 그대로 남겨둔 채 좌우의 성벽을 헐어 폭 8간(間)의 새 길을 내어 전차길을 마련했다. 전차가 서울시내에 운행되면서 사람과의 접촉사고다 잦아 그 때마다 시민들의 습격과 방화로 전차는 빈번이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전차가 개통되어 시민에게 공개된지 엿새만인 5월 26일 동대문에서 서대문 쪽으로 달리던 전차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선로를 건너던 5~6세의 어린이를 치어 죽게 하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고자 했다. 이를 본 군중은 격분하여 전차의 진행을 막고 운전사와 차장을 습격, 운전사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피해 어린이의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군중과 함께 전차를 불사르고, 운행중이던 다른 1대의 전차마저도 파괴하였다.

 

성난 군중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극심하던 가뭄도 전차가 서울의 거리를 달리기 대문이라고 하여 동대문발전소를 습격할 기세였다. 이에 놀란 경무사 즉 지금의 치안본부장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 겨우 군중을 해산시켰다.

 

폭등은 곧 진압되었으나 고종은 다음날인 27일에 사상자에 대하여는 충분한 보상을 하도록 경무청과 한성부에 엄중히 지시하는 한편 앞으로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칙유를 내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접촉사고와 군중폭동이 끊이지 않아 그 때마다 전차종업원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3.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전기

 

개항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번져 나가던 개화의 불길은 한일합방으로 하루아침에 시들어 버렸다.

 

일제는 민족문화를 억누르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짓밟아 가면서 한민족을 후진의 울타리속에 가두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일제의 잔학상은 전기분야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전력사업을 공익사업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이권으로 여김으로써 전기요금을 터무늬없이 올려 전등보급율은 현저히 낮았다.

 

이후 일제 36년의 암흑시대가 끝나고 이 땅에 광복의 물결이 밀려왔을 때 한반도에는 발전회사인 조선전업과 배전회사인 경전, 남전, 서전, 북전 등 5개 회사가 있었다.

 

그 당시 전국의 발전설비는 172만 kW, 이 가운데 약 90%인 152만 4,000kW가 북한에 있었고, 남한에 있는 발전소는 영월 및 당인리화력(지금의 서울화력)과 청평수력 등 몇 개 뿐이었다. 이들 발전소의 용량이래야 19만 9,000kW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38선이 긍진 후에도 북한에서 정치적 이유로 1948년 5월 14일일 정오를 기해 일방적으로 단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은 매우 크고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터에 6.25동란으로 발전설비와 송배전설비의 태반이 부서져 가히 암흑시대가 계속되는 듯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전기불 켜는 것은 생각 조차 할 수 없었고 호롱불과 촛불로 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 전기를 쓸 수 없는 것은 그대로 참을만 했지만, 생산공장의 기계를 돌리는데도 모자라니 나라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시 '보리고개'를 넘기기 위해 나라의 온 힘을 식량증산에 쏟아 넣었지만 '전기고객'를 해결하는 일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중요한 국가목표였다.

 

"전기 닳는다 일찍 자거라"하고 부모가 자식을 타이르던 말도 바로 이때 나온 말이다. 6.25동란으로 인한 국토분단과 함께 전력회사 가운데 북전이 떨어져 나가고, 서전은 개성, 문산, 옹진 등의 지역을 관할하다가 그후 경전에 흡수되어 전력사업은 조선전업을 비롯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3개사가 남한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줄곧 심각한 전력난과 만성적인 적자 운영으로 경영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러던 중 이들 3개사를 통합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로 발족함으로써 전력사업은 새 전환기를 맞았다.

 

5.16 군사정부는 그동안 논란만 거듭해오던 전기 3사의 통합론을 매듭짓고, 1961년 6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전원개발의 촉진과 전기사업의 합리적 운영'을 목적으로 한국전력주식회사법을 의결, 공포함으로써 마침내 같은 해 7월 1일 한국전력주식회사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국민의 여망을 안고 새로이 탄생한 한전은 지난 50년대에 심각한 전력부족으로 국민생활에 커다란 불편을 겪었던 과거를 거울 삼아 전력설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발맞춰 한전에서도 제1차 전원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전력난 타개에 투자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긴급전력대책으로 추진된 발전함 도입 등 4만 9,000kW의 설비를 조기 준공하는 한편 8개 계획사업의 신증설로 35만 3,100kW의 설비용량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이 기간중 부산화력 1,2호기가 준공됨으로써 해방후 19년동안 되풀이해 오던 전력난을 해소하고, 1964년 4월 1일을 기해 비로소 무제한 송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전력제한의 해제와 더불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가전기기의 보급등으로 전력수요는 해마다 늘어 한때 30%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 1967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하반기에 걸쳐 제한송전을 다시 실시하기도 하였다.

 

69년 10월 서울화력 5호기의 준공으로 100만kW의 전원을 확보한 이래 제3차 전원개발계획이 끝나가던 76년말에 이르러서는 설비규모가 480만 9,730kW에 달했다. 발전설비 또한 빈약한 수력자원에서 탈피, 화주수종형(火主水從型)으로 바뀌었는데, 73년에는 국제원유가의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77년부터 81년까지의 제4차 전원개발계획 기간은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가운데 1980년대를 개막하는 기반을 공고히 한 시기로서, 전력사업도 체제의 정비와 설비확충에 주력하여 국제규모의 기업으로 발전할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경제개발의 촉진으로 전력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발전설비의 단위용량이 대용량화하는 한편 78년 4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시설인 고리원자력 1호기가 준공됨으로써 본격적인 원자력발전시대를 열었다.

 

이에 따라 송변전설비 또한 대용량화하였으며, 배전선도 승압 등으로 수요증가에 따른 공급계통의 확충을 이루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 65년 12월 '농어촌전화촉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법의 시행에 따라 78년까지 14년동안 275만 4,600호를 전화(電化)함으로써 98%의 전기보급율을 달성했다. 그후 도서지구 전화사업에 착수하여 80년대에는 전기보급율 100%를 나타내게 되었다.

 

1982년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한국전력공사로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국민의 기업으로 태어난 한전은 연이은 제5,6차의 전원개발사업으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또다시 기술집약적 고도산업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사업은 그 자체만 하더라도 기계, 전기, 전자, 화학 등의 최첨단 과학기술의 종합체로서 관련 산업부문의 발달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고, 특히 원자력분야는 현대의 첨단과학기술이 집약된 산업인 것이다.

 

90년대를 넘어가면서 경제발전과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전력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 1996년에 최대수요가 3,000만kW를 돌파했다. 한전은 이에 따라 2000년 이루를 대비하는 전원개발계획을 마련하여 산업의 원동력인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4. 전력사업 100년 : 21세기를 여는 한국전력

 

1898년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된 전력사업이 올해로 벌써 103년의 역사를 헤아리게 된다.

 

지나온 1세기를 되돌아 볼 때 전력사업은 수많은 시련의 과정을 이겨내면서 발전규모뿐만 아니라 송.변.배전사업.고객서비스.기술개발 등 각 방면에 걸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최근 들어 한전은 다가오는 21세기를 대비해 회사의 조직과 제도, 직원의 의식을 개혁하고, 사업분야를 다각화하는 등 경영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해외시장에서 적극 진출하여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혀 나가는 등 전력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지속적인 조직축소로 감량경영을 구현하는 한편 권한을 과감히 하부로 위양하고 이에 따른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책임경영체제를 이루었다. 공정한 거래관행을 정착시켜 투명한 기업상을 정립하며, 정부투자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윤리강령을 제정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공기업으로서 그 역할을 다할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또한 효율적인 경영과 우수한 기업신인도를 바탕으로 회사 창립 이래 처음으로 주식을 뉴욕증시에 상장하였고, 원자력, 수화력, 송배전, 정보통신 등 전력사업 전반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사상 처음으로 중국 광동원전 정비기술 지원과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 복구 및 운영사업 등에도 진출하였다. 이는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함은 물론 우수한 경영능력과 국제경쟁력을 입증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UR 타결 및 OECD가입, 시장개방에 대비하기 위해 농어촌 지원사업과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지원사업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공기업으로서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한전은 값싸고 질좋은 전기의 안정적 공급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지난 30년간 전력기술의 자립화를 위한 기술개발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왔다.

 

500MW급 석탄화력의 한국표준형 설계개발과 한국표준형 원전의 세계적 공인 등 전력기술의 자립화를 통한 에너지 자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해마다 전기판매수익의 3%에 달하는 연구개발비를 투입, 국내 전력산업계의 구심점으로 기술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 노력과 부단한 기술개발로 한전은 93년과 94년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에서 연속 1,2위를 기록하였고, 지난해에도 1위를 차지하였으며, 기업문화상 기업부문 최우수상과 공기업으로서는 최초로 기업혁신사례 발표대회에 참가하여 은상을 받는 등 국내 최고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국외에서는 뉴욕증시 상장 2년만에 세계 최우수 전력회사로 선정되는 등 신흥시장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부상하였고, 세계100대 기업순위에서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2년 연속 70위권에 기록되었다

 

뿐만아니라 판매전력량 기준 세계 6위, 원전이용률 세계 1위, 세계의 발전소상 수상, 세계 최우수 프로젝트상 수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세계최고 수준의 기록을 달성함으로써 한전의 위상과 역량을 세계에 알려왔다.

 

또 한국표준형 원전이 세계적 공인을 받으면서 KEDO로부터 북한원전 건설사업의 주계약자로 선정됨으로써 남북교류와 통일한국의 물꼬를 트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한전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의 삶의 질을 한 차원 더 높이고 전력회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의 구성원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의식개혁과 경영혁신에 앞장서 나감으로써 '21세기 세계전력사업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