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생활 수기

고인이 되신 매형을 기리면서.

凡石 2011. 1. 3. 17:57

 

 어제('11.1.2)는 평소 존경하던 막내 매형의 장례식이 있어 부산에 다녀왔다. 구랍 마지막 날 부산에 있는 생질로부터 비보의 전화가 걸려 온다. 자기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에 작고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매형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지난 달 안부 전화를 드리 때만 해도,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좀 편찮으시다는 얘기만 들었지,그 정도로 위독한 상황인지는 미쳐 몰랐다.

 

 발인 날짜가 새 해 1월 2일이라고 하여, 아내와 조카 두 명이, 새해 첫 날 오후 3시 55분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당감동의 어는 종합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저녁 7시다. 이미 춘천에서 내려 온 큰 누님의 둘째 자제인 동현이 생질이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 한다. 이어서 천안과 안양에서 내려 온 둘째 누님의 자제들이 동부인 하여 함께 들어 온다.

 

 이모부님 또는 고모부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천리 길이 멀다 않고 찾아 온, 조카들의 마음이 어찌나 가상스럽던지 눈시울이 붉어 질 정도로 감개가 무량하다. 우리 일행 아홉명은 한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고인의 공덕과 업적을 회고하며 다같이 명복을 빌었다. 오늘 이 자리는 나의 동기간 자제(조카)들이 거의 참석하여, 오랜만에 대화하면서 우애를 더 한층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오늘 이렇게 조카들이 대거 모이게 된 것은, 이제 모두 불혹을 지나 환갑 나이가 되다 보니, 피붙이에 대한 정이 나이들어 가면서 더욱 진해 질 뿐더러, 생활이나 정신적으로도 어느정도 안정이 되어, 자연스럽게 동기간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면서, 더욱 가까워 지기 바란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동기간들끼리 친목회를 갖자고 제의 하였는데,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하면서 화창한 봄이 되면 병문이 조카가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고인께서는 올 해 연세가 81세로서 재 작년 여름에 8순을 넘기셨다. 내가 아는 그 분의 발자취는 파란만장하였다기 보다는 주로 군 생활과 항해생활을 통해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 오셨다고 본다. 물론 군 생활 하시는 동안 6.25 전쟁에 참전하시어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셨고, 그 결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으셨다. 전역 이후에는 1급 항해사 면허를 갖고 수 십년간 외항선을 타시면서 항해사와 선장을 역임하시다가 정년을 하셨다. 

 

 정년 후 집에 계시면서도, 군생활이나 항해에서 습득한 선박의 기관 운용 기술로 열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공동주택의 보일러 관리자로 근무하셨으며, 연세가 많아지자 그 일을 그만 두시고, 주로 노인 복지회관에 나가셔서 문화 예술 활동을 즐기셨다. 항해 활동에서 터득한 댄스 실력으로 스포츠댄스 과정을 맡아 강사로 활동하셨는데, 자이브, 탱고, 차차차, 룸바 등 못 추는 춤이 없어 , 젊은 강사들보다 오히려 더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났다.

 

 매형께서는 원래 성품이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편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처가에 오시면 항상 나와 내 조카에게 연필과 공책을 사다 주시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라고 격려를 해 주 시던 그 말씀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내가 결혼을 할 때도 제일 먼저 내 아내 될 사람을 소개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매형이 믿음직스럽고 자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은 막내 처남인 나에게 각별한 정을 갖고 남달이 대해 줬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한 없이 슬프고 아쉽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생전에 자주 찾아 뵙고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다. 

 

 그 분의 예능 소질과 풍류는 남다르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 일이다. 신혼 초에 처가집에 올 때는 항상 깔금한 해군 세라복 차림에 기타를 메고 와서, 당시 유행하던 "울어라 기타여"를 자기 반주에 맞추어 애절하게 부르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직까지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매형의 이미지는 그 때 그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어, 아주 멋진 분으로 각인 되어 있다.

 

 80평생을 사시면서, 두 아들을 아주 훌륭하게 키우셨다. 큰 아들은 모 대기업 연구소장을 지냈고 작은 아들은 현재 모 대학 중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부들도 잘 들어 왔다. 큰 자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둘째는 약사로 활동 중이다. 오로지 집안의 화목과 위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평생을 헌신 하신 그 분의 업적은 우리 후대들이 높이 평가 하여야 할 것이며, 그 분만이 갖고 있는 "멋과 낭만"의 풍류는 누구나 본 받아야 할 것이다.  

 

  아침 일찍 발인을 하여 부산 영락공원에서 화장을 한 후, 대전 현충원에 모셨다. 하루 종일 측은한 생각으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날 현충원에서의 합동 안장식은 매형을 포함하여 모두 12위를 모셨다. 장엄하게 치뤄진 안장식을 보면서 유족들의 슬픔이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종교 의식과 헌화 순으로 치뤄진 안장식 절차는 마치 국민장 의식과 다를 바가 없다. 부디 하늘 나라에 가셔서 이승에서 못 다한 꿈, 모두 이루시고 편히 영면하시기를 바란다. 

 

 다행이도 매형 묘소로부터 약 100여m 정도 떨어진 묘역에, 고인의 처가 쪽으로 고종 4촌 형님의 묘소가 있다. 이 두분은 원래 고향이 충청도 아산인데 일찌기 부산에 내려 와 터전을 잡은지가 수 십년이 넘는다. 더구나 범천동 중앙시장 주변의 어느 한 골목에서 서로 이웃이 되어 의지하면서 같이 사신 것도 수 십년이다. 그러다가 작년 9월 경 고종 4촌 형님이 먼저 하직을 하셔서 이곳 대전 현충원에 안장 된 것이다. 어쨌든 두 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자체가 두 집안의 유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