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올해 은퇴를 앞둔 슈퍼스타 파바로티

凡石 2009. 4. 27. 21:46
올해 은퇴를 앞둔 슈퍼스타 파바로티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2006년 10월 12일, 고향인 북부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열릴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기 한번 세월의 무상함을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2005년에 70세가 됩니다, 나이 60에 70세가 되면 은퇴하기로 결심 했지요, 내년이 되면
제 마음이 또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훌륭한 가수라 믿고 노래를 계속 부를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노래 인생을 그만 접고 싶습니다,"


1961년에 데뷔, 20세기 후반을 장식할 오페라계의 슈퍼스타로, 공연 제목이나 지휘자, 연주자, 연주자와 상관없이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극장이 가득 차기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형 공연장에 수만 명의 청중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가수는 오로지 파바로티뿐 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성악 보다는 기악을 더 좋아하는 필자도 파바로티가 물러간다는 소식에는 섭섭함을 금치 못하기에 그가 대 성악가다되기까지의 인생항로를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남성 가수들의 출생지를 살펴보면 베이스는 러시아, 바리톤은 독일, 테너는 이탈리아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테너 만큼은 이탈리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물론 그 나라에 유명한 바리톤이나 베이스 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리톤에는 레나토 브르존(Renato Bruson), 룻졔로 라이몬디(Ruggero Raimondi) 등이 있고, 베이스엔 체자레 시에피(Cesare Siepi)가 있으니 말이다, 또한 이탈리아 태생의 유명한 여성 가수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이렇듯 이탈리아는 옛날부터 성악가의 산지로 유명하기에, 그 까닭을 캐보려는 '이탈리아의
성악연구가'라는 직함이 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음역이나 노래하는
기술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지만 음색과 음량은 타고난 것, 즉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대를 이어 가려면, 기후나 풍토도 적절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맑게 개인 하늘, 온화한 기후, 건조한 공기의
이탈리아가 바로 그런 조건에 들어맞는 나라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필자가 10여 년 전 처음으로
베네치아의 운하에서 곤돌라 유람을 할 때, 곤돌라 사공의 우렁차고 낭랑한 목소리에 놀란 적이
있다, (부언하자면 한, 중, 일의 극동 3국 중에선 이탈리아와 유사한 조건을 갖춘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의 성대가 최고라는 말아 있다),

파바로티는 어린 시절부터 목소리가 좋았는지 교회에서 노래 부르기도 하고, 친구들의 부탁으로
세레나데를 불러 용돈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전업 가수의 길을 두고 고민한 것은 사범과정을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을 때었다, 현재의 뚱보 체격으로 봐서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 파바로티는 꽤 날씬한 청년으로 운동신경도 특출해 구기는 물론 육상경기 등
거의 모든 스포츠에 열중했기에 체조 교사가 되는 것이 제일의 소망이었다고 한다, 파바로티는
당시 교사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와 달리 성악 공부를 적극적으로 권한 어머니의 의견을 따랐다,
성악 공부에 전념하기를 결심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양친에게 30세가 될 때 까지는 뒷 바라지를
해주면서 잔소릴 하지 말 것, 그리하여 제가 성악가로 알려지게 되면 수익금을 집에 내 놓겠다는
애원인지, 협박인지 분간이 안가는 말을 남기고 음악교사를 찾아 나섰다고 하니....,
1954년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한국엔 멋진 제스처의 이바로티가!

만토봐에서 소프라노 레나타 데발디를 포함, 많은 유명가수를 배출한 캄포갈리아니를 5년 동안 사사하면서 그는 보험회사 외판원 노릇도 하고, 주변 자그마한 도시의 콘서트에 출연하면서 약간의 수입을 얻기도 했다, 이른바 고학이나 다름없는 성악공부를 한 셈이다, 파바로티가 자기 목소리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1960년 25세 때, 초조와 스트레스 때문에 목소리가 형편없게 되자 가수를 단념하려고 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종기가 사라지면서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좋아지는 행운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당시 내 목에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져 소리가 완성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수 개월 후인 1961년에 렛조, 에밀리아에서 개최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그 결과 라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다,그 후로는 승승장구, 세계 각처에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지극히 어렵다는 '하이 C음'도 멋지게 처리,'킹 오브 하이 C'로 불리게 됐다,

여기서 딴 얘기를 해 본다, 이 전에도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필자가 진행하고있는 '일산 돌체 토요 음악회'에 거의 매주 나오는 고정 회원 중에서도 특히 성악을 좋아하고 오페라에도 일가견을 갖고있는 위인의 이야기이다, 본직은 중앙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수로 본명은 '이OO'이기에 우리는 그를 당연히 '이 교수'라고 불러야 하지만, 돌체 토요음악회 회원들은 그를 필자가 만든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자그마한 콘서트 이지만, 연주회가 끝나면 연주자, 가수, 청중이 어울려 싸구려 안주와 맥주의 뒷 풀이가 있는데, 술이 몇잔 들어가면 다들 대범해져 어설픈 솜씨로도 피아노를 두들기는가 하면 들어주기도 곤란한 목소리로 나폴리 민요 한 곡을 뽑는 만용을 부리기 일수이다, 그 중에서도 이 교수만은 제법 괜찮은 목소리에 과히 빗나가지 않는 음정으로 유명 오페라 아리아를 테너로 불러왔다, 아무래도 목소리는 아마추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객관적인 평이지만, 제스처만큼은 파바로티의 버금갈 정도로 끝내 준다, 그리하여 생겨난 그의 닉네임이 '이바로티'(이 교수와 파바로티의 합성어임은 물론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테너 독창회가 있던 뒤풀이에서 아직 가수가 술좌석에 남아 있는데도 이바로티 교수는 거리낌 없이 멋진 제스처로 한 곡을 뽑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그날밤 수고한 가수의 귀에 대고 '베토벤이 들었으면 좋아하겠군요, 그는 귀가 먹었으니까'라고 해 좌중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아무튼 명창 파바로티는 사라지더라도, 명창(酩唱?) 이바로티는 계속 남아서 돌체 분위기를 즐겁게 해주기를.....

 

 

출처 - http://www.dolceclassic.co.kr/ (신동헌의 음악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