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Classic

1979년 뵘의 85세 생신을 축하하며 선물을 전달하는 카라얀

凡石 2009. 4. 27. 21:47

1979년 뵘의 85세 생신을 축하하며 선물을 전달하는 카라얀

(출처 : 잘츠부르크 축제 홈페이지)

 

 

 

 1. 뵘과 베를린 필

 

 뵘은 타계할 때까지 베를린 필과 매시즌 두 가지 이상의 프로그램을 지휘했습니다. 당대에 뵘은 베를린 필의 수석 객원지휘자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활동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뵘이 70년대 이전까지 주로 베를린 필과 레코딩 작업을 하다가 70년대에 이르러 빈 필로 레코딩 파트너를 바꾸게 된 것은 빈 필과 Decca의 전속 계약이 1969년에 마무리되면서 DG에서 빈 필과 레코딩을 할 수 있게 된 상황적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2. 객원지휘자들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자를 선정하는 것은 물론 음악감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지만, 음악감독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텐탄트가 초청하기도 하고, 단원들의 요구로 지휘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트, 번스타인 등등의 지휘자들이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지 못한 것은 카라얀의 개인적 선호가 일정 정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간단하게 카라얀이 이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번스타인의 경우 베를린 필 무대에 정식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지는 않았으나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개인적으로 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카라얀의 영향력이 베를린 필보다 훨씬 강하게 미치고 있었던 잘츠부르크 축제에는 초청되기도 했으며, 결국 마에스트로들이 잇달아 타계함으로써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말년의 카라얀이 번스타인에게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를 요청하기도 했었습니다.

 

 반트의 경우는 반트의 카라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휘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들(브루크너나 브람스)이 텐슈테트와 쥴리니, 하이팅크, 그리고 요훔 등의 중요한 객원 지휘자들에 의해 선점되었기 때문에 여건상 초청 불가였다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카라얀은 이들 지휘자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특히나 텐슈테트를 총애해서 그에게 자신이 지휘할 수 없게된 중요한 연주회 지휘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텐슈테트나 쥴리니 대신 반트를 초청했다면 나중에 텐슈테트와 쥴리니의 팬들이 카라얀에게 서운함을 느꼈겠죠.)

 

 

 3. 첼리비타케

 

 첼리비타케의 경우는 뭐... 지휘자와도 사이가 안좋았고 오케스트라와도 사이가 안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걸로 봐야겠죠.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첼리비타케의 베를린 필의 복귀 무대가 샤우슈필하우스가 된 것은 특별한 다른 이유가 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홀이 내부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이 샤우슈필하우스를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글 : 고클  liviuscato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