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07.10)는 현충원에가서 은행알을 주워 왔다. 집을 나설때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려 갈까말까 망설였으나 이정도 비는 오히려 가을 분위기를 더 한층 고조시킬 수있다고 생각되어 우산을 쓰고 집사람과 같이 집을 나섰다.
집에서 현충원까지는 걸어서 약 40분 정도면 갈 수 있어 걸어가기로 한것이다. 가는 도중 부슬비가 소낙비로 바뀌면서 천둥과 번개까지 친다. 이거 잘못온것 아냐? 하면서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집사람이 이왕 왔으니 가 보자고 하길래, 기특히 여겨 강행하기로 하였다.
이게 웬 일인가? 원내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의 걱정은 싹 가시고, 눈앞에 펄쳐지는 가을풍경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연못에 떨어지는 무수한 빗방울의 파문과 빗소리는 마치 한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과 같고, 현란한 오색단풍의 모습은 마치 노랑, 빨강, 초록물감으로 그려 놓은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산책로 양 옆으로 길게 뻗어나간 가로수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 길을 단둘이 걷고 있노라니, 마치 『뉴욕의 가을』이라는 영화 한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비에 젖은 단풍잎은 힘에 겨워 한잎 두잎 떨어지고, 떨어진 낙옆은 내 발길에 차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비오는날 현충원의 가을풍경은 한말로 환상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와 있다. 어떤이는 빨리 걷기운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천천히 걸으면서 은행알을 줍는이도 있다. 우리도 후자와 같이 은행알도 줍고 이름 모를 들꽃과 나무들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걷다보니 어느덧 박대통령과 육영수여사 묘소에 다달았다.
마침 엊그제가 서거 28주년이되는 날이었다. 당시 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8년이 지났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껴본다. 온 김에 묘소에 참배하기로 하고 방명록에 싸인을 하러 갔다. 명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마침 나의 전 참배객 이름이 탕정초교 18회 이 아무개(이름은 기억 못함)외 22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니가. 반가워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방명록에 선배들과 같이 탕정초교 제24회 강범식이라고 적고 묘소로 올라가 그 분의 업적을 기리고, 악몽같은 그 날을 회상하면서 분향과 묵념을 하였다.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천둥 번개도 더 심하였다. 걷다 보니 어느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데 갑자기 우산에서 툭툭... 투두둑하면서 우박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은행알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다. 신 나게 떨어지는 은행알을 주웠는데 문제는 담을데가 없는 것이다.이럴 줄 알았으면 비닐봉지 아니면 포대라도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여기서 집사람이 아이디어가 나왔다. 손수건을 꺼내 담기로 한것이다. 은행이 비에 젖어 손으로 주무르기만 해도 알맹이가 잘 빠져나온다. 마침 빗물이 아스팔트위로 흐르고 있어 흐르는 물에 비벼서 알맹이만 제거하기가 수월하였다. 은행은 계속 우산을 때리고 있고. 그럴수록 신이나서 계속 줏어대는데, 현충원을 빠져 나가야 하는시간이 다가 온다. 오후 6시까지 나가야 하니까 약 20분 남짓 남았다.
은행은 계속 떨어지는데 주을 시간은 없고 참으로 안타까웠다. 내일 아침 일찌기 와서 주워가기로 하고 아쉽지만 떠나는 수 밖에 없다. 마치 황금 덩어리를 눈앞에 두고 그냥 떠나야 하는 심정이라고 할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아쉬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은행알을 깨끗이 씻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물에 몇번 씻어 내도 지독한 냄새는 제거 되지 않는다. 씻어 놓고 보니 넉넉잡아 약 서너되 정도는 될 것같다. 하루에 예닐곱 알씩 먹으면 약이 된다는데, 겨우내 구워서 먹어 보려고 한다.
고즈넉한 현충원의 가을 풍경과 비를 맞으며 은행줍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
은행알을 깨끗이 씻어 베란다 샤시에서 말리고 있다.
오른쪽 것은 좀 마른 상태이고 왼쪽 것은 아직 덜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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